- 入冬 Part I
공기가 차다.
나의 첫사랑...
짝사랑도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부셔져 갈 무렵...
난 겨울이 온 것을 피부로 느꼈다.
학기말이라 부산스러운 교정도 왠지 앵글이 먼 화면처럼 투영된다.
느지막이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동아리 총무이던 성준이 어느새 다가와 말을 건다.
“두목~ 좋은 건수가 들어왔는데?”
동아리 장에 반장을 하고 있던 나에게 친구들은 ‘두목’ 이라고 부른다.
“응...?”
멍하니 창밖을 보며 성의 없이 대답을 하는 나에게 성준이 다시 말한다.
“좋은 건수가 생겼다고~”
실실 웃으면서 말하는 성준,
이 녀석이 웃으면서 이야기하면 무섭다.
“먼데?”
약간의 미심쩍은 표정으로 성준을 바라본다.
“내가 말이야 한빛여고 자동차부장이랑 같은 학원을 다니는데 걔들 이번에 학예전 하는데 도와달라는데?”
성준은 말을 마치고 ‘나 잘했지?’ 라는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린다.
하지만 만사가 귀찮은 나는
“그런데?”
하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녀석이 내 목에 팔을 두르는가 했더니 이내 조르기 시작했다.
“야! 왜이래? 큭...”
“형님이 좋은 건수를 물어다 줬으면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그 성의 없는 대답은 뭐냐? 대답만 해 도와 주러 갈꺼냐 말꺼냐?”
아무래도 내가 너무 성의가 없었나?
그래도 귀찮은 건 마찬가지다.
“알았어 도와주러 가자 도와주러 가면 될 것 아냐! 대신 애들한테는 니가 전달해라...”
마지못한 대답이지만 성준이 만족했는지 내 목을 조르던 팔을 풀면서
“할 것도 없으면서 빼기는... 전달은 내가 하마~ 날짜 정해지면 알려줄게~ 참고로 난 그 날 못 가니까 두목, 니가 애들 데리고 가~”
하고는 그냥 내빼버린다.
“응...? 야!”
이미 늦었다.
5교시 수업 종이 울렸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하루가 지나갔다.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터라 성준이 한 이야기를 난 까먹고 있었고 3일 쯤 지났나?
쉬는 시간에 성준이 와서는 다짜고짜
“두목! 내일이다.”
“뭐가?”
“뭐긴 뭐야 애들은 3명 정도 갈꺼고 015-xxxx-xxxx 이건 그쪽 장 삐삐번호다. 학교 정문 앞에서 삐삐 치면 나온 데~ 그럼 수고해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는 표정으로 성준을 쳐다보지만
“늦어도 7시까진 가줘라~”
라는 말을 남기곤 유유히 사라졌다.
아니 삐삐번호가 적힌 쪽지도 남았다.
이제 와서 궁시렁 거려봐야 소용없다.
다음날 별수 없이 후배 3명을 데리고 한빛여고로 향했다.
정문에 도착해서 쪽지에 적힌 삐삐번호로 자동차부장을 호출했고
잠시 후 교복치마 아래 체육복을 받쳐 입은 한 여자애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라고 말을 시작하는 자동차부장...
“오늘 아까 다른 부에서 남자애들 데리고 왔다가 샘한테 걸려 가지고~ 남자애들 도와주러 못 오게 해서 지금 들어가지 못할 건데...”
“...”
“이거 설치하는 거 어렵나?”
라고 말하며 애들이 들고 온 레일을 본다.
오기 싫은 거 억지로 왔는데 보자마자 반말하면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동차부장이 조금... 아니 많이 짜증났다.
성준이 놈 내일 죽여 버리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티내지 않는 말투로
“아... 어쩌나... 설명을 하기보단 한번 보는 게 빠른데... 그렇다고 여기서 설명하기도 힘들고...”
라고 말을 흐렸다.
솔직히 말하면 레일 다시 들고 돌아가기가 싫었다.
어떻게든 던져 놓고 가자는 심보...랄까...
“그럼 내가 샘한테 물어보고 머~ 쫄라보든지 할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있을래?”
“어...”
부장은 그 말만 남기고 잽싸게 학교로 올라갔다.
같이 간 후배들이 불평을 한다.
왜 온 거냐... 우릴 물로 보냐... 시끄럽다고 한마디 하자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다.
10분쯤 지났나?
부장이 내려와서 샘이 허락했는데 한 명만 된다면서 날 끌고 올라갈 기세다.
레일 무거운데... 라며 후배들을 쳐다보지만 녀석은 다 딴청이다.
“휴...”
한숨 한번 내쉬고는 부장을 뒤따랐다.
“근데... 너 이름 뭐냐?”
“효진~”
그게 다였다.
무슨 금남 지역도 아니고...
혼자 어색하게 학교 건물로 들어섰고
2층인가...에 있는 자동차부실로 들어갔다.
교복에 체육복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복장들의 여자 애들이 여기저기서 분주하다.
효진인가? 아무튼 부장이 애들을 불러 모은다.
여고가 무섭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암만 불러도 느긋하게 기어오는데 반해 여긴 부르자마자 일렬로 쭉 늘어선다.
그것도 내 앞에...
먼 넘의 남자냐? 라는 표정부터 시작해서 호기심어린 표정, 무표정까지 각양각색의 얼굴들이 내 눈앞에 늘어서 있다.
눈 마주치기가 무섭다...
효진이가 뭐라고 뭐라고 내 소개를 한다.
그리고 이 사람이 레일 설치하는 법 가르쳐 줄 테니까 배우라고 애들한테 말한다.
목이 탄다.
순식간에 애들 눈이 반짝 반짝거린다.
부담스럽다.
“에... 그니까... 모양을 잘 보고...”
내가 뭐라 설명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애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이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들 중에 나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버린...
한순간 너무 깊은 까만 눈동자에 빠져버린 내가...
돌이킬 수 없이 감정의 실타래가 풀려 가는...
모든 것이 흑백인 가운데 한 소녀만이 자신만의 색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정신을 다잡으며 다시 설명을 해 나갔지만
계속해서 주의를 끄는 그녀의 행동에
나의 감정들이 그녀에게로 흡수되어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렇게 그 해 겨울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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