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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남자 이야기3

글쟁이2013.09.22 23:47조회 수 1936추천 수 2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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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짓말

 

 

“선배, 저 지루해요.”

 

 때론 정말 어처구니없는, 그러니까 지극히 우연과도 같은 일로 시작되는 일들이 있다. 허무감에 훌쩍 군대로 도피할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리게 해준 골목에서, 꼬박 2년 뒤에, 그것도 같은 뒤풀이장소, 같은 자리, 아마도 거의 같은 시각에 어떤 여자애를 만났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걔한테 너도 지루하냐고 물었다. 같은 과 앤데, 이정미라고, 13학번이면 이제 막 20살인건가. 한학기가 지나도 화장이 서툰 그런 여자애……그런 애한테 그런 말을 해버렸다. 당황해서 대충 얼버무려버리고 다시 노랑통닭에 들어가려는 찰나에, 그 찰나에 여자애가 저런 말을 해버렸고, 나는 그러니깐, 들어버렸다.

 

“잘못 들었던 거 아니었나?”

“‘네?’라고 했지, 잘못 들었다고는 안 했는데요.”

 

 이런 당돌한. 정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고, 나는 흥미로워졌다. 나는 노란통닭 문턱에서 서서 잠시 정미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다시 골목으로 돌아왔다. 따각따각. 정미한테 걸어가는 발자국소리가 왜 이렇게 신경 쓰였는지 모르겠다. 괜히 구두를 신고와가지고. 겉멋은 잘 안 빠진다.

 

 나는 정미의 옆에 나란히 벽을 기대고 섰다. 아무래도 정면은 얘기하기 불편하니깐. 정미는 침묵을 지켰고, 뻘쭘했던 나는 담배를 찾으려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에 덩그러니 놓인 라이터만 만지고는, 생각해보니 봄에 금연을 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불현듯 떠올렸다. 언제한번 군대에 있을 때 소대장이 금연했다고 담배를 안 넣고 다니면서 라이터는 왜 주머니에 넣고 다는지를 물었을 때,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이상한 놈이구만’하는 놀림을 받았던 기억도 따라서 떠올랐다. 갑자기 생각해보건대, 아마도 주위에 라이터가 필요한 흡연자에게 불을 붙여주고 그 녀석이 내뿜는 연기를 들이마시며 간접흡연을 만끽하고파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너 담배피니?”

 

 그리고 침묵을 깨뜨리는 최악의 첫마디가 입에서 나오고 말았다. 인생이 의식의 흐름기법인 것도 아니고, 나는 왜 이렇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뱉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딱히 후회는 없었다. 평범한 인생에서 한두 번 평범함에 흠집을 내는 것. 그 정도쯤이야, 내 인생에 뭐 그리 큰일이겠는가.

 

“아뇨. 선밴요?”

“어, 나도 안 펴.”

 

 생각해보면 여자로써 굉장히 기분 나쁜 말을 한 건지도 몰랐다. 보통 여자라면 아마도 ‘저 담배 피게 생겼어요?’ 따위의 ‘갑자기 왜 시비 거느냐’의 동의어를 내뱉을 만도 한데. 하지만 정미의 반응은 짧았다. 그녀는 딱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단어들을 발음했다. 담배에 관대한 걸까? 그렇다면 개방적인 스타일인걸까? 아니면 짧은 두 마디에 이런 강박증에 가까운 추리를 시도하는 내가 이상한 걸까? 아무래도 후자인 듯싶다. 추리는 내 오래된 병이다.

 

“왜 지루하냐고 물으신 거예요?”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간 기분을 느꼈다. 너는 뭐가 지루하냐고, 그렇게 내가 물었어야할 질문이었다. 주도권을 빼앗아오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대답을 하고 곧바로 내가 질문을 던져서 흐름을 빼앗아오는 방법,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자체를 거짓으로 해버리는 것이다. 애초에 내 진실을 보여주지 않고 본인이 대화를 조종하고 있다고 믿게 하면서 대화를 진행하는 거지. 개인적으로 나는 후자를 선호했다. 간혹 음흉하다고 내게 말하는 사람들의 눈은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

 

“뒤풀이, 좀 지루해서. 왠지 너도 그런 것 같아서.”

 

 어쩌면 이런 내 태도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상한 게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처럼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하고, 또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최대한 나를 감추고 타인의 전부를 알고 싶어 하지. 일종의 관음증이다. 인터넷에서 연예인의 노출사고가 터지면 모자이크가 없는 사진을 찾고자 인터넷을 몇 시간이고 돌아다니는, 그날 하루 종일 인기검색어에서 누구누구노출이라는 키워드가 내려오질 않는 그런 우리들의 일반적인 관음증.

 

 왤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타인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적 혹은 동지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자신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집착한다. 물론, 여기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진화심리학, 행동심리학, 유전학 등등 온갖 학문들에서 찾아낸 이유들을 덕지덕지 붙여볼 수도 있지만, 그런 게 딱히 큰 소용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지. 세상은 적과 동지 그리고 어쩌면 적 또는 동지일지 모르는 미확인물체들, 딱 그뿐이다. 왜 주도하고 싶으냐고? 주도권의 유사어는 지배권이고, 여기에서의 지배는 지배당할 바에는 내가 먼저 지배한다는 뉘앙스를 가득 머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유일한 차이는 의식하고 안 하고의 차이일 뿐이다. 나처럼 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무의식중에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는 말이지. 웃기는 얘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평범하다는 것은, 지극히 그런 뜻이다. 이런 평범함을 인식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꼭두각시가 자신이 꼭두각시임을 안다고 해서 자신의 팔다리에 달린 줄들을 스스로 끊을 수없는 것처럼. 꼭두각시는 그래도 꼭두각시일 뿐이다. 너무 자명한 진리는 그 자명함으로 인하여 아무짝에 쓸모도 없는 법이다.

 

“저도 좀 그랬는데.”

 

 거짓말. 사실 우리 둘 모두 안다. 내가 던진 지루하냐는 물음과 그녀가 답한 나도 지루하다는, 그 물음들에 담긴 뉘앙스란 건 저런 피상적인 거짓말 따위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 뉘앙스란 건 순전히 니 느낌, 니 머릿속에서 멋대로 정해진 것들이 아니냐고? 이런 의혹들은 정당하다. 하지만, 혹시 내가 이 의문들에 정미의 눈빛이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면, 내가 터무니없는 미친놈이 되는 걸까? 눈빛이라니, 근거치고는 너무 낭만적이잖아? 그래도.

 

“어디사니?”

 

 이름, 나이, 사는 곳. 처음 만난 사람에게 던지는 모범적인 질의응답의 순서.

 

“커피집 가실래요?”

 

 동문서답은 예상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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