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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에서 교과서의 기능과 그에 따른 논쟁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정책 일환으로써의 국정화 논쟁에 대해 접근해보기로 한다.
교과서 파동은 기본적으로 공공문제에 대한 공식적 결정 활동지침 또는 공적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권위적 가치배분(D. Easton)에 대한 논쟁이라 할 수 있다. 고로 금번 교과서 논쟁 역시 정책 논쟁의 범주 안에서 진행되는 정치-행정 논쟁이라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정책 논쟁은 일반인의 생각과는 달리 '의제설정과정'에서 <정책창(J. Kingdon)>을 열어주어 전문가들의 사회적 대안과 대중들의 관심을 결합시키는 긍정적 기능이 있다. 따라서 정책창이 열리고 문제의 흐름, 정치 흐름, 정책 흐름이 상호 적합한 수준을 이루면, 수준높은 대안이 창출되면서 계층 간 결합과 민주적 갈등 관리 능력이 한층 성숙해진다.
그러나 기능론적 관점에서 낙관적으로 바라보면 -성경 글귀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정책창이 합리적 대안으로 귀결되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볼 게 아니라면 정책적으로 교과서 국정화 의제를 어떻게 따져보아야 할까? 필자가 행정학 전공이 아니고 본문이 행정학 강론도 아니므로 행정학 모형에 대한 세부 서술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다만 교과서 투쟁에 있어 정책의제 설정과 정책 참여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형을 통해 교과서 국정화 의제에 접근해 보도록 하자
본 논의에서 필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모형은 '정책 네트워크 모델(Policy Network model)'의 <정책공동체 모형>이다.
<정책공동체 모형>은
(1) 정책문제가 인적 그물망의 형태로 형성되어 있고
(2) 공식-비공식의 다양한 참여자가 존재하며
(3) 참여자 간 연계가 가능한 한편
(4) 참여자와 비참여자의 구분이 존재한다는 특질을 전제로 하단과 같은 특성을 보여준다.

정리해보면, 정책공동체 모형에서는 공식기구 밖 공론장에서의 비공식적 참여자들의 활발한 논의와는 별개로 정책 결정과 산출이 해당 관료와 전문가에 절대적으로 의존함을 알 수 있다. 악의적으로 표현하면 '시민의 의사진행과는 별개로 결정되는 정책 산출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것. 따라서 이 모형에 의거할 때 교과서는 담당 관료와 소수 전문가에 의해 결정되므로 비공식 참여자(대중)의 논의는 간접적인 형태의 낮은 정책 영향력만을 행사할 뿐이다.
물론 온 나라가 국정이나 검정이냐로 시끄럽고(=의제논의가 활발하고),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며(=정책창 열림), 정치적 접근(=외부성) 또한 활발한데, 이 모든 것이 밀실의 관료와 전문가에 의해 무력화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 회의에 대한 실증적 반론 근거를 하나씩 알아가보자.



<주진오, 「『한국근현대사』교과서의 집필기준과 검정 시스템」, 교과서 검정 과정>
이상의 과정을 보고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가 바로 민주시민의 자격을 지닌 사람이다. 앞으로 미래를 짊어질 예비시민인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봐야 하는 교과서, 그 교과서를 결정하는 막강한 권한이 관료와 소수 전문가 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니 말이다.
이게 딱히 좌익 진형의 일방적 진술이 아님은 우익진형의 강규형의 논설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강규형 시론>
논의를 약간 비켜가서 우익 진영의 진술에서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국정화 지지 입장에 매몰된 나머지 교과서 심의위원회(소수 전문가 집단)의 자의성과 폐쇄성을 행정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이념적 반대편의 무지라고만 매도하는 점이다. 물론 현행 국사학계와 교계가 편향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의위원회의 <정책공동체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 하면, 국정-검정의 교과서 형태와 상관없이 "자의성"과 "폐쇄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행정적-시스템 차원의 본질에 접근해 놓고서도 학계와 교계의 이념적 안배에 대한 변죽만 때린다면 정권에 따라 지지 학파의 권력 획득은 가능해도 보수진영이 늘 목표로 내세우는 국가적 차원의 통합과 정상화는 연목구어가 될 뿐이다.

<「교과서 집필기준(집필상의 유의점)」>


<7차 교육과정 한국사 「교육과정」: 세부적 지침과 달리 문건 생산자의 정보는 불명이다 >
교과서의 민간 참여도와 투명성을 높인 검인정 교과서 체제 하에서도 소수의 관료와 전문가 집단이 전체를 움직이는 -마치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실정이다. 국정 교과서라고 다를 수 있겠는가.
본디 정책이야 정책수립과 산출과정에서 해당 관료와 소수 전문가의 손을 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정책산출의 내부성은 문제될 사안이 아니다. 더불어 <정책공동체 모형>은 안정적이고 중립적으로 정책을 수립해 끌고 나갈 여지가 많다. 즉 실무진은 전문성을 발현하고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정책 대안과 문제점을 산출-검증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닌 것이다.
다만 정책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며 관료는 정책 수단을 입안하는 자이므로, 주권자인 국민이 '정책접근'과 '환류'를 통해 민주적 통제를 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행 교과서 프로세스는 민주적 통제성과 동떨어져 있다. 강규형의 진술에서 자율성에 입각한 '자의성'과 전문성 및 비밀보장을 명분으로 한 '폐쇄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다.
이것이 비단 인적 네트워크에 해당되는 것만도 아니다. 교과서의 시금석이되는 집필 지침, 그 지침을 결정하는 교과서 심의위원의 <선정기준>이 비공개 사안이다. '어떤 기준'으로 '누가' 심의위원을 선정하는지, 공식기구 밖의 외부인사는 알 수가 없다. 더불어 「집필기준」과 「교육과정」의 산출 및 심의위원회의 예산ㆍ경비 소요 및 운영은 완전 자율로 운영되며 이 역시 두터운 베일에 감추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양대 집필지침 문서 중「교육과정」문안은 정부의 공식문건임에도 불구하고 담당부서, 담당자 등 지침 생성자의 정보 그 어떤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특기할만 하다.
상술한 사안들을 종합했을 때, 교과서 논쟁의 정수는 국정-검정 따위의 교과서 형태에 달려있지 않음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의 내용과 방향은 교과서 집필자나 교과서 형태가 아니라「교과서 집필기준(집필상의 유의점)」과 「교육과정」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 기준을 정하는 권능은 '교과서 검정 심의위원'에 속하며, 그들을 선정하고 관리하는'관료'에게서 나온다. 이들 '보이지 않는 주먹'이 현실을 지배하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 하고, 교과서 형태가 이념적ㆍ기억적 투쟁의 향배를 정할 거라 믿고 다투는 좌ㆍ우진영이 딱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그들만의 리그'로 움직이는 시장에서 여기저기 판 돈을 걸며 목소리를 크게 내는 건 미련한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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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한국사 교과서 논란에 대해 살펴 본 바이다. 먼저 1편에서는 교과서 기능과 논쟁의 함의를 분석했다. 교과서의 본질적 기능인 학습교재로써 기능은 생략된 채 '기억으로써의 투쟁'과 '정치투쟁'의 <위장 의제>로써 논의되는 담론의 성격을 거칠게나마 짚어 보았다. 글을 단순 명료하게 쓰려했으나, 외려 더 투박하고 못난 글이 되어 안타깝다. 그 중 정치적 기능에 대한 논의에서 MB정권에 이어 또다시 교과서 파동을 일으킨 현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수완에 대해 좀 더 할 말 이 있었으나 주제를 벗어나기에 생략하였다. 언젠가 따로 논의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2편에서는 정책 네트워크 모델의 '정책공동체 모형'에 입각하여 현 교과서 파동의 핵심을 짚으려 시도하였다. 교과서 투쟁은 외부 민간인의 투쟁도와 달리 소수의 관료-전문가의 공식적 참여자에 의해 정책 결정이 이루어짐을 보이려 노력했다. 정책의 내부결정 유형은 정책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담보하는 기능이 있지만 민주적 통제성과는 배치되며, 현행 교과서의 편찬에 있어 <보이지 않는 주먹(관료-전문가)>의 권한과 실태를 제시하였다.
교과서 문제에 천착하여 졸업논문으로 한국사 교과서를 해부한 것이 벌써 수 년 전 일임에도, 아직도 교과서 논쟁이 본질에 다가서지 못한 채 정치꾼들의 일성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혁명의 열정은 관료제의 앙금만을 남기고 사라진다던 어느 실존주의 소설가의 금언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짧지 않은 글이기도 하고 해서 원 글 작성자분께서 해두신 구분에 따라 1편, 2편으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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