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썻던거라 ~다.여도 이해부탁드릴께욥!
이번 총학생회 선거 결과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전통적으로 소위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학생들이 오랜 기간 동안 학생회를 유지하던 것이 이번 선거에서는 비운동권을 표방하는 학생들이 이변적으로 선거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전례 없는 이 결과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은 그동안의 총학생회가 지향하던 방향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것이 이번 선거로 표출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이 말은 타당한 이야기이다. 87년 이후로 형성된 학생운동세력은(운동권) 사실상 거의 30년을 똑같이 그 구조를 유지했다. 이는 변화한 적 없는 커리큘럼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른 많은 활동도 있지만 특히 커리큘럼 속 “농활”의 존재는 기존 총학생회, 운동권 세력의 특징을 잘 나타내준다. 이제는 구식 구분이 되어버린 소위 민족해방, 민중민주(NL과 PD)이라는 운동권의 두 세력 속에서 부산대학교 운동권은 전통적으로 NL성향이 강했다. 민족해방이라는 구호 자체가 1920년대 레닌이 각각의 민족이 식민국가에 대해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공산주의 확산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내린 결정이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50년이 지난 70년대에 이 강령을 그대로 실천한 경우다. (한국 좌파의 노선에서 아픈 손가락으로 불리는 경기 동부, 이석기로 잘 알려진 노선이 북한에 대한 반-이성적 결론을 내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농활은 이러한 레닌에 강령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 1920~30년대의 한국의 시나브로운동, 농촌계몽운동이 모태이며, 이 구조를 본 따 만든 것이 지금까지 커리큘럼 한 칸에 남아 있는 농활 운동의 역사적 바탕이다.
이렇게까지 구태된 학생회가 약간의 변화라고 부를 수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해 조금의 비약을 포함해서 “민주화 투사”라는 세력이 정치적 주체로서 효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 30년이 지나 갔다. 87년에 조직된 전대협의 짧은 6년의 역사는 대학생 계급이 정치적 세력으로써 무너져가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93년 전대협의 해체는 더 이상 대학생이 정치적 주체로서 힘을 잃었음을 말해주고(또한 경제적 주체로서의 몰락은 97년 imf였고, 최근 들어 죽은 것을 모르다가 이제야 죽은 시체가 죽은 것을 안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한총련의 조직은 이전의 잔여물이자 이전의 향수에 대한, 거세된 지난 시절에 대한 충실로써 남아 현재까지 유지되었다. 실제로 현재의 커리큘럼이 정식화된 것은 90년대 초반부터이다. 이 이후로 어떠한 새로운 것도 없이 과거를 반복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선거 결과는 단순히 기존 총학생회의 실망에서 일어난, 수동적인 결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행위의 작인이 학생들의 선택이 아닌 학생회의 부패라는 식으로 읽혀서는 안 되며, 오히려 진정한 정치적 주체로서 대학생이 다시 등장했다는 사건의 시작으로 읽어야한다. 물론 여기에는 이 후 학생회의 활동이 더욱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선본이 교체되었다는 것 그 사실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혹자는 비운동권인 선본이 학생회가 된 것을 대학생의 정치적 참여가 퇴보했다고, 대학생의 정치적 참여가 이제 사라졌다라고 개탄한다. 특히나 기존의 운동권인 학생들에서, “민주화 세대”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하지만 “정치”의 본래적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이는 완전히 틀린 이야기이다. 지금 대학생은 그들의 우려와는 달리 정치적으로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을 떠올려보라, 정치가 내용적이라면 정치적인 것은 형식적이다. 정치의 근본적인 의미가 공동체에 관련된 자신의 삶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형식이라는 것, 즉 민주주의, 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보자. 고대 그리스를 생각해봐도 좋다. 정치란 단순히 물건을 사듯이 펼쳐져있는 공개적 입장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방향을 능동적으로 정하는 것이었다. 전 총학생회가 평화나비 활동을 진행한 것이 정치의 부분이되 정치적인 것이 아닌 이유가 공동체내에서 대학생이라는 위치의 효력이 정확히 사라졌기 때문이다.(한편으로 11년의 반값등록금문제는 대의적이긴하여도 확실히 정치적이었다.) 따라서 지금의 선거결과는 대학공동체라는 내부에서 더 이상 운동권이라는 지위에 있는 한 세력에게 부산대학교 공동체의 운명을 더 이상 맡기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치는 그만두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기존의 총학생회, 정확히 말해 87년 혁명에 의해 형성되고, 보통 선거권이라는 민주주의의 궁극적 산물을 성취해낸 세력, “민주화”로 대표되는 이 세력은 민주주의를 구호로 내세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보수 계열의 대표 인사인 이명박의 형, 이재오는 한국 민주 운동사를 집필한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다. 한때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 보수계열의 대표인사가 된 사실은 민주주의의 세부적인 분열, 근본적으로 자유와 평등의 상충 혹은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상충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최근의 사태와 관련해서 뭉뚱그려 모두 같은 보수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민주화-보수 계열과 이와는 맥이 다른 한국사회에서 주된 축을 형성하는 박정희-보수의 분열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87년 이후 3당 합방으로 하나가 되었고, 이후 지금에 이르러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견고했던 보수층이 무너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민주투사”라는 경력은 더 구체적으로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서 말해지는 모든 활동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진솔함을, 충실함을 나타내는 기표가 되지 못한다.(그렇기에 우리 고-고현철 교수님의 투신은 더욱이 비극적이다. 죽음으로써 구하고자 하는, 성취된 민주주의는 오지 않은 것이다.) 진솔함을 나타내려면 허울뿐인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외쳐야 하는 것이다. 자유보다는 평등을. 보다 잔인하게 말하자면 “그때”는 누구나 민주화 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어떤 하늘로부터 명을 받은 그런 사명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태어난 적 없는 민주주의는(87년 이후 형성된 민주화 세력, 더불어 학생운동 세력) 보통선거권 이라는 허상의 존재로 민주주의를 대변하며 마치 유령처럼 지속된 것이다.
이는 당시의 민주화 세력이 기득권이 된 지금의 사회의 병폐가 증명해준다.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이는 정말로 허용된, 직접적으로 말해 대의민주주의,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웟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정의롭지 못했다. 이는 단지 볼 수는 있지만 접근할 수는 없는 장벽이다. 선거권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를 가지게 된 대신에 역설적으로 특권적 권위주의를 체득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 의식이 없는 대학생과 계몽된 특권적 운동권이라는 대립은 사회 속에서 변주된 형태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대변할 정치적 참여가 아니라, 정치적 경험 그 자체이다. 이것이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선거의 결과가 대학생이 정치적 주체로 되살아나고 있다고 보는 이유이다.(이는 단지 그들이 잘못해서 심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을 한 것이다. 한나라당의 회초리 광고를 생각해보라, 단지 주부 술부의 약간의 변화지만 그 속에는 능동과 수동이 오간다.) 지금까지 우리는 특권적 대의적 운동권에게 투표를 하면서 우리의 주체적 권리를 포기하고, 대신 그에 상응하는 “올바른” 자위적 만족을 얻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혹자가 이제는 대학생이 선도하는 정치가 사라졌구나하고 개탄하고, 대학생에게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가르칠 것이 있는, “정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구나 세력으로, 무지한 자라고 여겨지게 될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너희는 내가 말하는 말을 하지 않아”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대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없다는 통상적인 생각은 틀렸다. 정치에 관심은 없지만 누구보다 “정치적”인 존재가 되었다. 우리에게 결여된 것은 입장표명이 아니라 이것이 정말로 올바른지 그른지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어른”들은 요즘 대학생들이 운동을(사회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서 도서관에만 공시에만 매달린다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패기와 열정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로 이 사회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 대학생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주체가 되는 것이, 운동의 주체가 자기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현실이 약은 것은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머뭇거리는 것은 이 현실이 올바른 것으로, 그른 것으로 “살기 힘들다“를 넘어서 선악의 판단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현실이 단순히 나쁜 것이 아니라 악이며 이를 부정한다는 것. 자신의 바탕을 부정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미 이번 총학 선거에서 그것이 이루어졌다. 기존 총학생회가 오래되었던 것과 동시에 많은 제도적 병폐들이 자리 잡고 있다(의결구조, 총학생회 기구의 난잡함, 불투명한 구조, ‘회비’사용.. 등등). 이제 다시 필요한 것은 이를 계속 이어나가는 용기일 것이다. 작은 대학의 일이지만, 이 일로 대학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의 공동체를 다시 되찾아 올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희망은 밖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