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노란통닭 골목2
"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여자 입에서 나온 되물음.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미 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는 진리는 너무 가혹하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말. 프로이트는 이딴 짓을 하는 것을 '무의식'이라고 명칭했는데, 나는 매순간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이 무의식이란 놈이 굉장히 싫었다. 근데, 단순히 상황을 난처하게 만들어서 무의식이 싫은 걸까? 아니. 무의식이 진정 싫은 것은 이 녀석은 늘 나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너도 지루하냐?'는 물음은 사실 빼곰히 쭈그리고 앉아 있는 여자를 향한 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향한 무의식의 질문인 셈이다. 겉모습은 타자와의 의사소통이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냥 자문자답인 경우에 불과한 대화들. 우리가 대화라고 부르는 것은 거의 대부분 이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잘 생각해보라.
"선배님?"
"아, 아냐."
얼버무려버림. 손까지 흔들면서 아니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일어선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여자의 외모에 대한 정보가 분석된다. 대한민국 여성 평균 키, 평균 체형, 눈이 고양이 처럼 날카롭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외엔 딱히 특징없는 평범한 얼굴, 아마도 신입생이라 아직 서툰 화장 그리고 얘야 비비크림은 티 안나게 좀 발라라, 하고 조언해주고픈 욕구를 억누른다고 꾹 다문 내 입술이 연상됐다. 조금은 심술궃은 연상인가.
"안녕, 나는 11학번 정재석이라고 해."
예전에 신입생 MT에 갔을 때, 과대하던 형이 신입생은 1년 동안 자기소개 100번한다고 생각하시면 된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 말은 정말인 듯싶다. 하도 많이 뱉은 멘트인지라 전화기에 저장된 자동응답인 마냥 목례 후 곧바로 간략한 자기소개멘트가 나왔다.
"아, 저는 13학번 이정미라고 합니다."
이쪽에서도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자기소개멘트를 던진다. 1학년 1학기 때 보지 못했던 선배가 갑자기 1학년 2학기 때 나타난 이유를ㅡ군대갔다와서 그런거라고ㅡ설명해야할까, 말까를 고민하다 그냥 얘기해줬다. 정미는 '아, 그렇구나'하는 혼잣말을 한다. 처음만난 후배와 선배의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평범한, 무슨 교범에 적힌 모범답안인 마냥 펼쳐지는 그런 대화. 술기운 탓일까, 골목길에 단 둘이 서있는 쭈뼛쭈뼛한 상황인데도 크게 긴장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평소같았으면 어색함을 타개하려고 무슨 말이든 쥐어짜거나 다시 술집 안으로 들어가버렸을 텐데. 하긴, 이 골목은 이상한 구석이 있다. 2년전에도 견디기 힘든 그런 이상한 지겨움을 느꼈었는데. 수맥이라도 흐르나.
"뭐하고 있었나?"
"바람 좀 쐬려고요. 선배는요?"
"나도 바람 좀 쐬려고."
어쩌다 나온 말은 3초만에 끊겨버린다. 정미는 폰을 만지막 거린다. 오지도 않은 카톡을 확인하는걸테지. 사실 나는 지금 얘가 자기 신발을 보는 건지 폰을 보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건 시선둘 때만 찾으면 되는 게임이니깐. 문득 '술 많이 마셨어?'하는 말이 떠올랐지만 그냥 하지 않았다. 어쩌면 무의식이 이미 예상되는 지루한 대화를 거부한 것일수도.
"선배 많이 드셨어요?"
"아니, 조금."
아무래도 침묵을 견디기 힘든 쪽은 정미쪽인 모양이다. 내가 선배라서 그런걸까. 나는 '너는?'이라고 묻지 않았다. 여자들은 이런 뉘앙스 차이에 민감하다. 정미는 더이상 말을 붙이지 않는다.
"석아 뭐하냐, 들어가인마, 영호형이 너 찾어!"
갑자기 뒤에서 동기가 나를 부른다. 영호형은 이번에 같이 복한한 선배인데, 아무래도 혼자 새내기들 틈에 있어서 괜히 외로움이라도 느꼈던 모양이다. 술잔을 부딪치며 다들 웃고 떠드는 그 지루한 도가니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건가. 또 적는 말이지만, 이건 관성이다. 나는 관성의 힘에 이끌려 다시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길테지. 후라이드 치킨 안주나 좀 남아 있었으면.
"아 그래, 어...정미라고 했나? 다음에 보면 밥이나 한끼하자."
의례적인 말이다. 저런 말 한다고 진짜 밥먹자고 카톡이 오는 것도 아니고, 나도 할 생각 없다. 빈말인데, 우리는 늘상 저런 걸 입에 달고 산다. 어색함에서 도피하기 위한 소비성 멘트. 예의라고도 부르는데, 어찌됐든 평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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