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음과 같은 전단지를 받았다. 2011년 법원판결<기성회비 안내도 된다!> 알고 계셨나요? 글의 골자는 간단하다. 기성회비는 법적 근거가 없으며 법원으로부터 이의 징수는 부당하다는 판결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은 기성회비를 등록금 고지서에 포함시켜 강제적인 징수를 해서는 안 되며, 기성회비를 걷지 않아 생기게 될 재정 문제는 국공립대학의 설립 취지에 맞게 국가의 지원금으로 매워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논리적으로, 위 전단의 내용은 하자가 없다. 기성회비가 등록금의 필수구성 중 하나로서 징수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국립대학의 설립취지에 맞게 국고지원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말 역시 옳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 텍스트가 위치해야 할 현실적 맥락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가에게는 그럴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다. 불가능한 요구라는 것이다.
지구의 자본은 사막화되고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 더 이상 자본이 자본을 낳아 부의 증식이 일어나는 일은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전 지구의 자본주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 세계의 지갑 노릇을 해오던 미국이 2007년을 기점으로 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가장 필수적인 동력을 잃어버렸다. 자본이라는 이름의 마르지 않은 샘을 말이다. 자본은 더 이상 자가증식 할 수 없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고하는 사실이 바로 이 점이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구매를 가능케 했던 가공의 자본이 거품처럼 꺼져버리면서, 세계는 재화를 세계시장에 판매함으로써 거대한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70년대 자본주의적 신화가 임종을 맞이하는 장면을 두 눈 뜨고 목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는 앞으로의 세계자본주의가 결코 저고용저성장 국면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일자리는 결코 창출될 수 없으며 GDP 상승률이 1~2% 수준을 넘어설 일 역시 없을 것이다. 지구의 자본이 마르고 있다.
자본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사민주의도 마찬가지다. 북유럽을 보라. 과거 10년, 그토록 찬양받던 복지정책은 망조의 길을 걷고 있다. 국가가 산업을 통해 재정을 마련할 수 없으니 이를 대체하기 위한 사회구성원의 세수증대는 점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있다. 베링 브레이비크와 같은 민족주의적-기독교 근본주의적 극우파가 사민주의의 성지 노르웨이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가가 고용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 부의 증대를 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사회구성원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외려 북유럽국가와 같은 복지국가에서 더욱 체감도가 높다. 브레이비크가 네이팜 탄을 쏘아댄 대상은 무슬림들이 아니었다. 바로 집권당인 사민당이 주관하는 청소년 캠프에 참가한 ‘진보적 청년’들이었다. 국가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국민이 국가의 무능함으로 절망하게 될 때 그 분노가 국가에 화를 입힌 것이 아닌가?
자본주의가 점차 목이 졸려오는 이 시점에서 가장 큰 위선 중 하나는 바로 ‘현실’ 좌파들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주장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욥에게 아들을 살해해 신앙을 증명하라고 요구한 구약의 신이 떠오른다. 항상 옳고 정의롭고 전능해야할 신은 욥이 처한 위기 상황을 결코 면제시킬 수 없다. 단언컨대 신은 무능했다. 신이 전능했다면 욥을 이러한 불구덩이에 빠뜨리지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현실의 좌파는 욥에게 이러한 불가능한 요구를 퍼붓는 신의 행태를 꼭 닮지 않았는가? 고용을 창출하라, 복지를 강화하라,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라…. 절대적으로 옳으나 절대 실현될 수는 없는 요구를 주저리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이들 현실 좌파의 무능함을 증명해 보이는 징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 앞에 ‘같잖은 보수’가 득세하는 꼴이 벌어지는 데는 바로 이런 현실 좌파의 무능함이 기저에 자리 잡고 있다. 이들 ‘같잖은 보수’는 정치적 중립, 정치적 의도가 배제된, 구성원에 헌신적인 정책의 입안과 실천을 요구하는 척한다. 짧게 말해 이들은 중립적 스탠스를 가진 것처럼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이들이 자신들은 정치적 편향을 혐오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바로 현실 좌파의 무능에 따른 반작용이다. 좌파는 상식에 맞지 않는 주장을 빗발치게 요구하는데다 온갖 도덕적인 퍼포먼스는 다 부리면서 정작 까놓고 보면 부패한 인사가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판단하건대 좌파가 몰상식한 주장을 하는 것은 진영논리라고 하는 맥락이 실종된 우리 쪽 편들기에 매몰됐기 때문이며 사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사회적 대의를 위한 원대한 꿈 따위는 실종된 지 오래고 이미 현실 정치 깊숙이에서 이 사회를 자기들 편으로 선동하기에만 급급한 세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같잖은 보수’는 진영논리를 철저히 배척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 사회의 사상적 공간이 좌우가 공평한 힘을 갖는 그러한 중립적인 이상점이 되기를 바란다. 꼭 리영희의 저작 제목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의 주장 역시 철저한 위선이라는 것, 그 속이 눈에 훤히 보이는 빤한 짓이라는 점은 사뭇 자명하다. ‘같잖은 보수’는 양비론을 통한 일면의 긍정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좌편향과 우편향 모두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이들이 중립지대로 모여들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들의 행태는 보수찬동, 반동일 따름이다. 이들이 보기에 오늘날의 정국은 좌편향 되어있으며, 그러므로 이 사회의 사상적 분위기를 좌에서 우로 끌어주어야만 중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중립을 이와 같이 기계적인 산술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 나아가 자신들의 보수적 성향을 은근히 중립이라는 이름의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포장으로 둔갑시키는 것, 진영논리에서 벗어난 ‘탈정치’를 선언하지만 이미 탈정치 선언 그 자체로 매우 정치적인 퍼포먼스라는 것(그들이 말하는 정치란 ‘좌파가 득세하는 시궁창’이며 탈정치란 그러므로 ‘좌파를 몰아낸 우파가 차지할 복낙원’이지 않은가?) 등은 이들이 어째서 같잖은가를 잘 설명해준다고 본다. 존재의 목적이 현실좌파에 대한 비난에 있다는 점, 그 목적의 실현을 현실좌파가 해왔던 진영논리를 똑같이 반복한다는 점에 있어 이들은 급수 낮은 ‘같잖은’ 세력일 뿐이다. 그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중립적-탈정치적인 무언가는 이미 그들 자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말소된다.
최근 들어 연일 뭇매를 맞고 있는 총학생회와 그 공격의 중심에 있는 ‘같잖은 보수’를 보자. ‘같잖은 보수’는 총학이 국정원사태에 대한 대대적인 입장표명과 행사계획 등을 하느라 정작 학생을 위한 복지정책을 실천하는 데에는 매우 소홀한 점을 지적한다. 거기다 이석기 의원의 내란예비음모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성명조차 없음을 비판한다. 요컨대 총학이 존재하는 이유인 학생복지는 내팽개치고 편향된 정치놀이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진영논리에 입각한 헛소리인가? 정치적 중립을 말하는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국정원 사태 비판은 진보요 이석기 사태 비판은 보수라는 매우 깔끔한 도식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국정원 사태와 이석기 사태라는 서로 독립된 문제를 두고 “왜 국정원만 까는 거냐!”는 유치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진영논리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애초에 두 문제는 사회에 미칠 영향력에 있어 그 경중이 현격히 차이 나는 문제다. 국정원 사태는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현 정권의 정당성, 나아가서 역대 남한 민주주의 정부의 정치적 청렴 전체가 의심받는 중죄다. 한편 이석기 사태는 형법의 위반이자 국가보안법의 위반이다. 국가보안법이 민주주의를 억압하던 유신 시대의 잔재라는 점은 모두가 안다. 물론 이석기는 주체사상에 경도된 종북세력이다. 종북세력이 남한의 국회에 입성한 것 역시 물론 커다란 문제다. 그러나 이석기와 같은 종북세력이 정말 이들 ‘같잖은 세력’이 주장하는 만큼 위협적일까? 까놓고 물어보자. 한국에 종북세력이 몇이나 있을까? 현재 통합진보당에 속해있는 일부와 민족운동에 있을 소수의 몇 세력에 불과할 것이다. 이들이 국가전복을 시도한다고 해서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남한의 안보체계가 이석기와 같은 군사문외한 몇 백 명에 의해 무너질 만큼 허술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총학에 대한 ‘같잖은 보수’의 공격 중에서 그나마 옳은 말이라고 한다면 총학이 학생복지에 소홀한 채 교외의 사건에 크게 매몰되어 있다는 지적일 것이다. 대학은 더 이상 80년대 민족지성 결합의 장이 아니며, 학생들 스스로부터 대학이 지성사회의 핵심으로서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중심이 돼야 한다고 지각하지 않고 있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오늘날의 학우들은 사회적(80년대에는 민족적이라 불렀을 법한) 문제에 총학이 투신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론이 그러하다면 집행부는 이를 따라 정책을 실시함이 옳다. 물론 이 글을 쓰는 본인과 같이 총학이 더 이상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지 못하는, 서서는 안 되는 상황에 쓴 입맛을 다시는 사람도 있겠으나 민주적 절차에 의해 들어선 권력이라면 민주적 의결에 근거한 권력행사를 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은 옳다.
문제는 이들 ‘같잖은 보수’의 학생복지에 대한 지적 역시 진영논리에 포섭된 ‘정치적 공격’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무능한 총학으로 말미암아 분연히 자리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운동권에 대한 맹목적 반감에 불과하다. 철저히 진영논리에 근거한 싸구려 위선이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이들 역시 학생복지 실현에 대한 뜻 같은 것은 없다고 본다. 총학의 복지정책실현 미흡을 비판하는 어느 ‘같잖은 보수’ 단체 중 하나는 10.16 기념관에다 강용석을 데려와 강연회를 하겠다고 한다(단체 이름은 대학혁신위원회 정도였던 것 같다. 혁신이라?). 도대체 강용석과 학생복지는 무슨 관계에 있는 것이며, 강용석이라고 하는 후안무치 보수인사의 아이콘을 데려오는 저의는 또 뭐며, 많고 많은 장소 중에 왜 하필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신새벽을 연 자랑스러운 그 날을 기념하는 10.16 기념관이라는 공간에서 그와 같은 행사를 자행하는 것인가? 그들이 그토록 비난하는 운동권이 주도하여 쟁취해 낸 남한의 민주주의 역사를 담아낸 그 공간에 강용석을? 내 눈에 이는 남한민중사에 대한 모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게 학생복지에 대한 대의 따윈 없다. 무능한 좌파, 보기 싫은 운동권 총학을 욕하고 공격하는 일 외에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더러운 위선이다.
일련의 몰아닥치는 보수광풍을 보며 우리 사회의 좌파가 정말 각성해야 함을 크게 깨닫는다. 우리는 더 이상 국가를 상대로 불가능한 것들을 요구하며 스스로의 무능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더욱 확고한 입장과 더 나은 사회를 위한다는 대의를 다져야 한다. 다행히도 오늘날의 좌파는 기본소득제의 도입에 관한 정책적 연구(강남훈), 노동자 사외이사권 도입(김상봉) 등 그 큰 대의를 버리지 않는 선에서의 ‘현실적 모색’을 꾀하려 한다. 운동하는 좌파는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다. 애초에 오늘날의 운동이란 ‘운동을 위한 운동’인 면이 강했다. 운동의 지속을 위한, 계속해서 운동하기 위한 운동, 운동의 목적을 잃은 기계적 운동 말이다. 우리가 ‘같잖은 보수’ 따위들에게서 기득권이니 진영논리니 대의가 없으니 하는 정말 같잖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앞으로의 좌파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더 나은 곳을 꿈꾸기 위해 기꺼이 쟈코뱅의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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