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대한 생각
- 2020.01.29.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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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예전처럼 자주 하지 않는 대신, 한번 생각이 꼬리를 물면 끊길 줄을 모른다. 오늘 밤도 그랬다. 지친 몸을 이끌고 간신히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수면은 커녕 잠의 언저리에도 가지 못하고 머리는 익숙한 주제를 나에게 던져줬다. 자살이었다. 늘상 거치던 순서대로 유서를 한글자씩 머리속으로 적어보고, 익명의 커뮤니티에 죽고싶다는 글을 쓰고 얼굴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의 '죽지 말라'는 말에 힘내자고 다짐하지만 그렇게 힘을 낼 수 있는 것이었으면 난 진즉 잠들었을 것이다.
사람은 왜 사는 걸까? 난 이 의문을 15년도부터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이유없이 심장이 답답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일들이 종종 있었는데 주변 친구들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진 못했으나 어림해서 짐작해보건데 적어도 내 주변에서 그런 증상을 앓는 건 나밖에 없었다. 힘든 일은 그만두고 내려놓고 싶은게 사람의 본성이니만큼 나 또한 수험생활에 지친 몸과 정신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증상까지 겹쳐지니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게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만 힘든거야?", "나만 이렇게 약한건가?", "나만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건 당시 수험생이었던 나에게 공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는데, 당연하게도 난 수험생이기 이전에 내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떨어진 한 사람이었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건 곧 죽음을 선택해도 됨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삶에 이유가 없고, 죽음에 더 큰 무게가 주어진다면 죽는게 합리적인 일이니까. 하지만 삶의 이유를 찾는건 쉽지 않았다. 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인터넷의 다양한 익명 커뮤니티를 활용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을 길이 없었고, 학교의 상담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기엔 너무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지식인에 글을 올렸다. 내용인 즉슨 '삶에서 느끼는 행복보다 고통이 더 크다면 죽는 것이 옳은 선택이 아닌가. 사람들이 자살을 죄악시하고 막는 이유는 생명은 소중하다는 피상적인 이유 단 한가지가 다인가?' 라는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고맙게도 아직까지도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글을 종종 다시 읽을 기회가 생기는데, 다행인 건 5년이 지난 지금 내가 5년 전의 나에게 대답을 해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기투된 존재이며 끊임없이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죽음은 내 삶의 모든 가능성을 말소하는 능동적 선택이지만 반복하듯이 이 역시 나의 선택이다. 자살은 이유가 어쨌건 삶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저울에 올린 물건 중 더 무거운 것을 취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저울이 기우는 쪽을 택하는 것은 지극히 경제적인 선택이다.
물론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를 하는 존재라는 말이 있듯이 나 또한 합리화의 늪에서 벗어날 순 없다. 자살에 대한 내 바람이 더 이상 합리적 선택이 아닌 합리화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어느 순간부터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대신 '죽어야 할 이유'를 찾는 내 모습을 발견한 때부터였다. 나는 죽기를 작정한 사람처럼 모든 것들을 '죽어야 할 이유'로 삼기 시작했다. 독하지 못하니까, 자신이 없으니까, 용기가 없으니까, 몸이 약하니까, 오늘 신은 신발이 짝짝이었으니까, 밥을 잘못 먹고 급체를 해서 온몸이 쑤시니까.
별 같잖은 이유를 가져다대면서 어서 내가 죽기만을 바라는, 죽을 용기를 담는 컵이 있다면 그것이 넘쳐흘러서 내가 용기 있게 죽을 수 있길 바라는 내 모습은 가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한발짝 물러서 바라보면 한심하고 미련해보였다. 마치 스스로가 거인국에 태어난 소인같았다. 거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들어올리는 인생의 무게를 혼자 낑낑대면서 발끝만치도 들어올리지 못하는 소인.
나는 오늘도 웃고 떠들고 미래에 대한 시시콜콜한 걱정을 친구들과 나누며 낮을 보냈지만 밤이 된 지금은 누구보다도 작은 소인이 돼서 어서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지길 바란다. 언젠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면 그 시일이 최대한 가까이 찾아오길 빈다, 잠 못들고 질질 짜며 보내는 밤이 하나라도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이들은 나를 위해 잠시동안은 슬퍼하더라도 다시 일어서 자신의 삶을 굳세게 살아나가길 빈다. 물론 그들이 내 죽음에 주저앉을 것이라 해도 그것이 내 죽음에 대해 고려하는 이유가 되진 않을 것이다. 나를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생각해주진 않았으면 한다. 수십개의 알약을 모아놓고서 부모님을 생각하고 그만뒀던 날들이, 옥상에 올라갔다가 친구들을 생각하며 내려온 날들이, 칼을 꺼내들고 자신을 다잡으며 내려놓은 날들이 수십일이다.
오늘도 난 결국 죽지 못했고 이 글을 쓴 뒤 잠들어 내일 깨어나 하루를 보내겠지만, 가슴 한켠에는 죽음을 늘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 해 나갈 것이다. 이게 내게 남은 날동안 주어진 것이라면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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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 사람주나무]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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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왜나무]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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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한 흰꿀풀]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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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곰취]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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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코스모스]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별 의미없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살하고 싶게 만드는 이유 또한 사실 따지고 보면 별 일 아닐 수도 있어요. 그냥 여행하듯 하루하루를 맘 편히 살아가면 되는 것인데,. 자살을 고려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사회에서 의미를 부여한 어떤 가치를 추구하다가 지쳐서 자살을 생각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추구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있고,
행복을 위해 그 프로그래밍을 가끔 뛰어넘기도 하지만,.
자살이란 결론이 나온건 외부 데이터의 영향이 컸다고 볼수 밖에 없어요,.
개인적으로 '친구들과 미래에 대한 시시콜콜한 걱정을 나눈다'라는 부분이 그렇게 느껴져요.
사람들이 하는 걱정의 70%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20%는 걱정해도 달라지지 않을 일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건강한 사람들은 저런 대화를 하지 않아요.
제가 예민하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 제 생각을 전해봅니다.
투박한 글이지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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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접시꽃]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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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한 칠엽수]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나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가?" "나는 왜 사는 것인가?" 와 같은 존재론적 근원적 질문을 저도 늘 수십년동안 가지고 살았고 한때 지독한 허무주의와 니힐리즘에 빠졌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고자 쾌락으로도 허무함을 채워보고, 술로도 채워보고, 학문으로도 채워보고 세상적인 모든 것들로 채워봤지만 일시적일뿐 이러한 존재론적 허무함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더군요
이런 세상적인 쾌락, 욕구 등으로는 이러한 인간 내면의 깊은 허무함과 허망함을 도저히 채울 수 없었고 세상적인 것들로는 일시적일 뿐 영원한 만족과 진정한 채움이 없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전 교회를 가게 됐습니다
성경에서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갖고 있었던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나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가?"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이후에 어디로 갈 것인지 알게 되었고 이땅에서의 근원적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어주심으로써 내 모든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셨고(대속),
그에 따라 내 영혼과 육체는 예수 핏값으로 값지게 지불된 바 된 것이기에 나의 남은 인생은 오직 예수를 위해서만 살아가야할 의무가 나에겐 생성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돈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고, 썩어없어질 어떠한 세상적인 가치가 아닌
바로 이것이 제가 살아가는 삶의 근원적, 근본적, 본질적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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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좋은 바위채송화]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사람마다 살아가는이유는 다르고 그걸 하나로 결론 낸다는게 이상한겁니다
사람이라는게 생각을 하다보면 좁아져서 가끔은 숲을 볼 필요가있어요 크게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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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감나무]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늘 죽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나도 역겹고 미래엔 나아질까 하는 희망을 갖기도 그 또한 절망이 될것을 알기에 이대로 살아만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힘내라거나 화이팅하란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건 기적입니다 마키아밸리의 말처럼 당신의 포르투나가 바닥에 있는 지금, 당신의 비르투로 극복해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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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만첩해당화]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저랑 비슷한 사람이신 것 같아 댓글 남기고 갑니다
일단은. 일단은 죽지말고 살아봅시다. 일단은 죽지는 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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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등대풀]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정말 힘들면 한 2주 뒤에 죽자, 1달 뒤에 죽자. 라고 생각을 해요. 정말 고통스럽고 재미가 없으니까 그때 죽으려고. 근데 모순적이게도 그 때 죽을 수 있다 생각하면 지겹고 힘든 이 순간도 좀 덜 무겁게 느껴지더라구요. 해방구가 생긴 느낌.
그렇게 몇 주를 살다보면 그 중 하루정도는 내가 이렇게 기뻐도 될까. 즐거워도 괜찮을까. 느낄 정도로 즐거운 날이 하루정도는 있더라구요. 정말 하루정도는.
저도 우울증 증세가 심해질 땐 다시 엄청 심해지는 편이라 신체적 고통이 없음에도 사는게 참 무의미하다고 느낄 때가 많은 편이에요.
근데 그게 정점을 찍어서 정말 죽고 싶을 때마다 저렇게 생각하면 좀 달라지더라고요.
웃긴데 내가 조만간 죽을 수 있다 생각하면 이 지겨운 삶이 끝이 난다는거니까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물론 저도 지금은 또 그럭저럭 견뎌내지만 다시 심해지면 자살이라는 해방구를 정해놓고 살아갈지 모르죠. 근데 그냥 살아가보고 있어요. 뻔하지만 좋은 날은 하루는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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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디기탈리스]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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