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서울대생의 자살이 유언의 전문과 함께 매스컴에 실리며 크게 이슈가 되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고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이유가 있든지 간에 신체 멀쩡하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자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자살을 한다는 것은 이해 될 수도 없고 정당화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살이란 한 마디로 더 이상의 삶을 자발적으로 포기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지적 관점으로 자살한 학생S군의 심리와 상황을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유서를 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크게 좌절하고 체념한 것으로 보입니다.
S군은 불합리성이 합리성으로 둔갑하는 세태에 대해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군요." 라고
유서에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S군은 만약 삶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클 때 자살도 비합리적인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자신의 자살을 합리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S군의 자살은 결코 옳은 선택이 아니며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그가
경험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이 세상이 과연 S군의 생각만큼 불합리 한가? 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S군의 나이는 20살 정도 밖에 안된 사회에 이제 막 발을 딛은 대학생이죠. 그의 일천한 사회경험이 과연 제대로 이 사회를 이해했을 지 저는 조금 의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이치에 위배되는 이기적인 힘 있는 자들의 횡포를 목도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정말 파렴치하고 분노를 치밀어 오르게 하죠.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그러한 이기적인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남을 위해 봉사하고 올바른 사회를 위해 힘쓰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이러한 분들의 노력들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올바른 사회의 가치를 만들어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 사회는 악과 불의만이 존재 하는게 아니라 선과 정의도 같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S군도 충분히 자신이 바라는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재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그러한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리고 우리로서도 안타까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그러한 가능성이라는 씨앗은 우리가 삶을 살아나가야만 발현됩니다. 그러나 죽는다면 그 가능성은 0%에 가깝습니다. 내가 죽는다면 나의 사상과 계획들은 실행되지 못하고 그냥 땅에 파묻히거나 화장되는 겁니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이야기 모두 아실겁니다. 억울하게 궁형이란 치욕적인 형벌을 받고도 그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목표이자 아버지의 유언인 사기를 집필 합니다. 만약 사마천이 자신의 이러한 불행에 마냥 비관하며 자살을 했다면 사기라는 불후의 명작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삶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크다? 경제적인 사고의 소산이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저의 생각에는 그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죽어보지도 않은 인간이 어떻게 죽음의 고통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저는 언제나 삶이 죽음보다 더 큰 효용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S군의 궁극적인 이상은 자신이 생각하는 합리성이 가득한 세상, 즉 수저의 색깔이 아닌 전두엽의 색깔이 생존을 결정하는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였을까요?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 조상들의 속담이 있죠. 어찌보면 지금보다 더 불합리하고 살기 어려웠던 시대의 우리 조상들에게서 나온 속담이 전하는 삶의 가치는 오늘 저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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