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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대학 평가의 잣대 -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이준구교수

끼얏호2011.09.26 19:07조회 수 4701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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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이준구교수


어이없는 대학 평가의 잣대

최근 J일보가 발표한 2007년도 전국대학평가 보고서를 보고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보고서의 평가가 문제의 핵심을 한참 비껴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네가 어떤 방법으로 대학의 질을 평가했는지를 설명한 글을
보면 제법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과연 어떤 대학이 좋은 대학인지를 잘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 방법은 무식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 좋은 대학이란 활발한 연구와 충실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대학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가 대학 평가의 핵심적 기준이 되어야 평가 결과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런
데 문제의 그 보고서를 보면 다른 사소한 측면들이 평가 결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교육의 질의 경우에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무런 평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보고서를 보고 대학을 선택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
런 사람이 있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보고서의 여러 평가 항목 중 ‘국제화의 정도’에는 14%나 되는 꽤 높은 가중치가 부여
되어 있다. 그 세부 내역을 보면, 외국인 교수의 비율 4%, 영어 강좌 비율 4%, 외국인 학
생 비율 4% 등으로 되어 있다. 겉보기만 하면 그럴듯한 평가기준일 수 있지만,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로 어이없는 기준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모두가 국제화를 외
쳐대니까 거기에 편승해 그럴듯한 평가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얕은꾀가 너무나도 빤히 드러
난다.

우선 외국인 교수의 비율이 왜 긍정적인 평가항목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교수들 중에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자기 나라에서 최고 수준에 있는 학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
르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컨대 미국에서 잘 나가는 교수를 스카우트해 오려면 막대한
돈이 들 텐데, 그런 수준의 교수를 대거 영입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 교
수들에 비해 학문적 수준이 그다지 높지도 않은 외국 교수들이 와 있다고 해서 왜 높은 평
가를 받아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어강좌 비율을 긍정적 평가의 잣대로 사용하는 것은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최근
일부 대학이 영어강좌의 비율이 높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정말로 한심
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영어로 강의가 진행되는 것이 과연 무엇 때문에 바람직한 일
이 되어야 할까? 영어 교습 시간이라면 100% 영어로 강의를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할지 모
른다. 그러나 철학을, 경제학을, 법학을 영어로 강의한다 해서 학생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가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언어라는 것이 무엇인가? 언어는 의사소통과 정보전달의 수단 그 이상도 그 이
하도 아니다. 제대로 의사를 소통할 수 없고 제대로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 언어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무척 비효율적인 일이다.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를 수강한 대다수의 학생들이
강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넘어간다고 고백하는 것을 듣지도 못하는가?

어떤 사람은 외국으로 유학 갈 경우에 대한 준비로서 영어 강의가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외국으로 유학을 가는 소수의 학생을 위해 대다수의 학생을 희생하는 것은 말이 되
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게 영어 실력을 늘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바
람직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를 듣는다고 영어 실력이 얼마나 늘지 정
말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 시간에 오히려 CNN 뉴스를 보면 영어 실력이 훨씬 더 크게
늘리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설사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가 영어 실력을 늘리는 데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학습의 내용
이 부실해지는 데 따르는 엄청난 비용을 정당화 하지 못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우리말로
차근차근, 몇 번을 거듭해 설명해도 학생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다. 모국어로
대화하는 경우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대화하는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 완벽한 이해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알아들은 체 하면서 넘어갈 수는 있겠지만,
완벽한 이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를 둘러싼 호들갑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영어 숭배주의’와
맥이 닿아 있다. 국제화를 위해 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어를
하지 못해도 업무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 직종도 수없이 많다. 사회활동을 하는 데 영
어보다 중요한 조건이 얼마든지 많은데도, 많은 기업들이 영어에 엄청나게 높은 비중을 두
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직 우리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애에게 영어 과외를
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말(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초등학교부터 영어 교육을 의무화
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이부키 분메이(伊吹文明) 일본 문부과학상의 발언은 신선한 충격
이 아닐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 상황인데, 왜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올바른 얘기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요즈음의 학생들을 보면서 영어를 배우기에 앞서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법부터 배워야 할 사람이 많다고 느낀 것이 비단 나뿐이 아닐 것이다.

국제화도 좋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근본을 바로 잡는 일이다. 우리말 가르치
기는 소홀히 하면서 영어 가르치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우리의 세태를 보면서 본말이 전
도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J일보의 대학 평가는 이와 같은 사회 일반의 병폐를 그대로 답
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책임 있는 언론이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냉철
하게 판단하고 사회를 향해 용감하게 소리를 높여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국제화를 부르짖는 것은 책임 있는 언론이 할 일이 아니다.

J일보의 보고서와는 관련이 없지만, 말이 나온 김에 대학 교육을 평가하는 기준의 문제에
대해 좀더 얘기해 보기로 하겠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대학 교육의 평가기준 중 잘 납
득되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강의의 규모가 작을수록 강의의 질이 좋을
것이라는 평가기준이다. 물론 콩나물시루 같은 강의실 분위기에서 강의가 효과적으로 이루
어질 리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강의의 규모와 강의의 질 사이에 뚜렷한 상관관계는 없
다.

또 하나 납득하기 힘든 것은 강의가 토론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맹목적인 잣
대다. 이런 잣대를 들이대면 교수의 강의 위주로 진행되는 수업은 무조건 ‘주입식 교육’으로
폄하되고 만다. 그러나 수업의 성격상 어떤 것은 토론 위주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한 반
면, 어떤 것은 강의 위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토론 위주로 진행되어야만 바람직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대학 교육의 질을 평가하는 문제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공감하는 평가 결과를
내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것이 적절한
평가기준이며 어떤 것이 부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까지 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이
점에서 볼 때, J일보 대학평가 보고서를 위시해 지금까지 나온 많은 대학평가 결과가 사람
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크게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이왕 대학 평가를 할 바에야,
무엇이 적절한 기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좀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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