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무좀걸린 송악2018.09.22 08:11조회 수 7103추천 수 109댓글 29

    • 글자 크기

서울대 정외과 교수님이 쓰신 칼럼이라는데

너무 웃겨서 들고왔어욬ㅋㅋㅋㅋㅋㅋ

다들 주변 잔소리없이 행복한 추석 잘보내시길ㅎㅎ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밥을 먹다가 주변 사람을 긴장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음식을 한가득 입에 물고서 소리 내어 말해보라. “나는 누구인가.” 아마 함께 밥 먹던 사람들이 수저질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당신을 쳐다볼 것이다. 정체성을 따지는 질문은 대개 위기 상황에서나 제기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평상시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 한국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하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한국이 어떤 정책을 집행하는지, 즉 정체성보다는 근황과 행위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 규정을 위협할 만한 특이한 사태가 발생하면, 새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내 친구가 그 좋은 예다. 그의 부인은 일상의 사물을 재료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인데, 얼마 전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오래된 연애편지를 활용해서 만든 것도 있었다. 특이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앞에서 작품의 소재가 된 옛 연애편지를 읽어보았다. 그런데 그 내용과 표현이 내 감수성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느끼해서 그만 그 자리에서 토할 뻔했다. 혹여 내가 연애편지를 쓰게 되는 상황에 다시 처한다면, “영민”이란 이름을 한 글자로 줄여서 “민”이라고 자칭하지는 않으리라. 나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지 않으리라. “민은 이렇게 생각한답니다”와 같은 문장을 쓰지 않으리라. “사랑하는 나의 희에게, 희로부터 애달픈 사랑을 듬뿍 받고 싶은 민으로부터”와 같은 표현은 결코 구사하지 않으리라.

심정지가 올 정도로 느끼한 문장으로 가득 찬 그 연애편지가 하도 인상적이어서, 그 작품을 만든 친구 부인에게 이거 대체 누가 쓴 편지냐고 물었다. 그러자 천연덕스럽게 “대학 시절 연애할 때 제 남편이 제게 보낸 편지예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과학자의 탈을 쓴 그 친구에게 이와 같은 면모가 있었다니! 며칠 뒤, 그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급기야 “그거 네가 쓴 연애편지라며?”라고 묻고 말았다. 그랬더니 평소 감정의 큰 기복이 없던 그 친구가 정서적 동요를 보이면서, 자신도 전시회에서 그 편지를 보고 그 내용과 표현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놀리고 싶어진 나는 왜 그런 느끼한 표현을 썼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갑자기 과학자다운 평정심을 잃고 고성을 질러댔다. “그 편지를 쓰던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 내가 왜 그랬냐고 묻지 마!”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괴성을 지르며 나를 할퀴었다. 그 더러운 손톱에 할퀴어지는 바람에, 내 손목은 진리를 위해 순교한 중세 성인처럼 피를 흘렸다.

그 친구의 이러한 난동은 정체성의 질문이란 위기 상황에서 제기되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과거를 부정하기 위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파괴하려 들었던 것이다. 하나의 통합된 인격과 내력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한 것이다. 오늘도 그는 그 느끼한 연애편지를 쓰던 자신과 현재의 ‘쿨한’ 자신을 화해시키고,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인문학적으로’ 씨름하고 있으리라.

추석을 맞아 모여든 친척들은 늘 그러했던 것처럼 당신의 근황에 과도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취직은 했는지, 결혼할 계획은 있는지, 아이는 언제 낳을 것인지, 살은 언제 뺄 것인지 등등. 그러나 21세기의 냉정한 과학자가 느끼한 연애편지를 쓰던 20세기 청년이 더 이상 아니듯이, 당신도 과거의 당신이 아니며, 친척도 과거의 친척이 아니며, 가족도 옛날의 가족이 아니며, 추석도 과거의 추석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질문은 집어치워 주시죠”라는 시선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아버지가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고 하거든 “후손이란 무엇인가”. “늘그막에 외로워서 그런단다”라고 하거든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하니”라고 하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칼럼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정치사상

    • 글자 크기
[레알피누] 교대랑 통합시 교대가 엄청 손해인가요? (by 근엄한 꽃마리)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우울증 극복하신분 있나요 (by 침울한 먼나무)

댓글 달기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욕설/반말시 글쓰기 권한 영구 정지10 저렴한 개불알꽃 2019.01.26
공지 식물원 이용규칙 (2018/09/30 최종 업데이트) - 학생회 관련 게시글, 댓글 가능17 흔한 달뿌리풀 2013.03.04
163628 학교에서 외국인 남자가 아는척하던데 여자분들 조심하세요29 촉박한 자리공 2018.10.07
163627 자유관 - 불평등 랜드마크29 화려한 단풍나무 2018.10.07
163626 본가가 부산인데 학교 앞에서 자취하시는 분 계시나요??29 즐거운 콩 2018.10.06
163625 [레알피누] 교대랑 통합시 교대가 엄청 손해인가요?29 근엄한 꽃마리 2018.09.29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29 무좀걸린 송악 2018.09.22
163623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우울증 극복하신분 있나요29 침울한 먼나무 2018.09.15
163622 자취방 바퀴벌레 나오면 어떡하나요??29 다부진 거제수나무 2018.09.09
163621 이기적인 사람들 참 많지 않나요29 게으른 담배 2018.09.07
163620 일본 소소하게 걸어다니다가 올만한곳 있나요,?29 답답한 하늘타리 2018.08.30
163619 컴잘알분들 pc 견적좀 봐주세요29 깔끔한 쑥방망이 2018.08.26
163618 .29 머리나쁜 편도 2018.08.21
163617 우병우vs고승덕29 초라한 편백 2018.08.20
163616 .29 외로운 매화나무 2018.08.09
163615 치질수술 해보신분...29 활동적인 홍단풍 2018.08.03
163614 금정 아주머니분들 학생이 잔반처리반입니까?29 민망한 석류나무 2018.08.02
163613 [레알피누] 소수과 분들 아직도 과행사 강제참여 이런 것 있나요?29 육중한 환삼덩굴 2018.07.28
163612 셋이서 밥먹는데 제가 돈을 자연스럽게 내는 법29 바쁜 섬초롱꽃 2018.07.22
163611 [레알피누] 노 붙이는 사투리....29 침착한 무릇 2018.07.04
163610 군필분들만 봐주세요.29 친숙한 애기현호색 2018.07.03
163609 [레알피누] 우리학교가 다른학교에 비해서 행정이 전반적으로 늦는듯29 늠름한 산단풍 2018.07.03
첨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