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예전처럼 자주 하지 않는 대신, 한번 생각이 꼬리를 물면 끊길 줄을 모른다. 오늘 밤도 그랬다. 지친 몸을 이끌고 간신히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수면은 커녕 잠의 언저리에도 가지 못하고 머리는 익숙한 주제를 나에게 던져줬다. 자살이었다. 늘상 거치던 순서대로 유서를 한글자씩 머리속으로 적어보고, 익명의 커뮤니티에 죽고싶다는 글을 쓰고 얼굴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의 '죽지 말라'는 말에 힘내자고 다짐하지만 그렇게 힘을 낼 수 있는 것이었으면 난 진즉 잠들었을 것이다.
사람은 왜 사는 걸까? 난 이 의문을 15년도부터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이유없이 심장이 답답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일들이 종종 있었는데 주변 친구들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진 못했으나 어림해서 짐작해보건데 적어도 내 주변에서 그런 증상을 앓는 건 나밖에 없었다. 힘든 일은 그만두고 내려놓고 싶은게 사람의 본성이니만큼 나 또한 수험생활에 지친 몸과 정신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증상까지 겹쳐지니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게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만 힘든거야?", "나만 이렇게 약한건가?", "나만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건 당시 수험생이었던 나에게 공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는데, 당연하게도 난 수험생이기 이전에 내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떨어진 한 사람이었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건 곧 죽음을 선택해도 됨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삶에 이유가 없고, 죽음에 더 큰 무게가 주어진다면 죽는게 합리적인 일이니까. 하지만 삶의 이유를 찾는건 쉽지 않았다. 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인터넷의 다양한 익명 커뮤니티를 활용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을 길이 없었고, 학교의 상담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기엔 너무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지식인에 글을 올렸다. 내용인 즉슨 '삶에서 느끼는 행복보다 고통이 더 크다면 죽는 것이 옳은 선택이 아닌가. 사람들이 자살을 죄악시하고 막는 이유는 생명은 소중하다는 피상적인 이유 단 한가지가 다인가?' 라는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고맙게도 아직까지도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글을 종종 다시 읽을 기회가 생기는데, 다행인 건 5년이 지난 지금 내가 5년 전의 나에게 대답을 해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기투된 존재이며 끊임없이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죽음은 내 삶의 모든 가능성을 말소하는 능동적 선택이지만 반복하듯이 이 역시 나의 선택이다. 자살은 이유가 어쨌건 삶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저울에 올린 물건 중 더 무거운 것을 취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저울이 기우는 쪽을 택하는 것은 지극히 경제적인 선택이다.
물론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를 하는 존재라는 말이 있듯이 나 또한 합리화의 늪에서 벗어날 순 없다. 자살에 대한 내 바람이 더 이상 합리적 선택이 아닌 합리화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어느 순간부터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대신 '죽어야 할 이유'를 찾는 내 모습을 발견한 때부터였다. 나는 죽기를 작정한 사람처럼 모든 것들을 '죽어야 할 이유'로 삼기 시작했다. 독하지 못하니까, 자신이 없으니까, 용기가 없으니까, 몸이 약하니까, 오늘 신은 신발이 짝짝이었으니까, 밥을 잘못 먹고 급체를 해서 온몸이 쑤시니까.
별 같잖은 이유를 가져다대면서 어서 내가 죽기만을 바라는, 죽을 용기를 담는 컵이 있다면 그것이 넘쳐흘러서 내가 용기 있게 죽을 수 있길 바라는 내 모습은 가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한발짝 물러서 바라보면 한심하고 미련해보였다. 마치 스스로가 거인국에 태어난 소인같았다. 거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들어올리는 인생의 무게를 혼자 낑낑대면서 발끝만치도 들어올리지 못하는 소인.
나는 오늘도 웃고 떠들고 미래에 대한 시시콜콜한 걱정을 친구들과 나누며 낮을 보냈지만 밤이 된 지금은 누구보다도 작은 소인이 돼서 어서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지길 바란다. 언젠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면 그 시일이 최대한 가까이 찾아오길 빈다, 잠 못들고 질질 짜며 보내는 밤이 하나라도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이들은 나를 위해 잠시동안은 슬퍼하더라도 다시 일어서 자신의 삶을 굳세게 살아나가길 빈다. 물론 그들이 내 죽음에 주저앉을 것이라 해도 그것이 내 죽음에 대해 고려하는 이유가 되진 않을 것이다. 나를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생각해주진 않았으면 한다. 수십개의 알약을 모아놓고서 부모님을 생각하고 그만뒀던 날들이, 옥상에 올라갔다가 친구들을 생각하며 내려온 날들이, 칼을 꺼내들고 자신을 다잡으며 내려놓은 날들이 수십일이다.
오늘도 난 결국 죽지 못했고 이 글을 쓴 뒤 잠들어 내일 깨어나 하루를 보내겠지만, 가슴 한켠에는 죽음을 늘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 해 나갈 것이다. 이게 내게 남은 날동안 주어진 것이라면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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