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에게.

활동적인 털머위2013.09.14 21:30조회 수 2220추천 수 2댓글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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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씨.

 

저는 타인의 감정에 무딘 남자입니다. 단순한 성격상의 무뚝뚝함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같은 인간임에도 ‘감정’이라는 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문제군요.

 

감정보다는 숫자로 환원될 수 있어 손쉽게 파악이 가능한 숫자가 저에겐 더 익숙한 행동기준이랍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이해관계와 효율성으로 환원해버리는 것. 네, 저도 잘 압니다. 인간미 없는 타산적인 속물이라는 것.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군요. 진실이란 개인의 기호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진실이고, 꾸밈없는 사실이랍니다. 몇 자 더 적어보겠습니다.

 

저는 거의 모든 생활의 것들을 제 이해관계에 따라 재단합니다. 성과에 아귀만 들어맞는다면 타인의 감정 같은 요소는 모두 배제하고 일을 진행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배제하고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그 요소들을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니까요. 그래서 종종 타인의 악감정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엔 죄의식 따윈 없습니다. 저는 인간을 사물처럼 여기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으며, 이용가치가 없어진 인간을 망각하는 것도 너무도 손쉽게 해치웁니다. 좀 더 정확히 고백하자면, 저는 인간의 죄의식이라는 감정 자체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선천적인 양심이라는 단어도 저에겐 공허한 형이상학의 용어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압니다. 이런 제 모습을 보신다면 절 혐오하시겠지요. 당연합니다. K씨를 탓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이코패스 같은 병리학적인 용어로 저를 낙인찍진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저는 제 심리에 대해서 기술한 것이지, 제 모든 행동의 모습이나 결과들이 그래왔다고 기술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회 안에서 지극히 평범한 후배이고 선배이고 동기입니다. 종종 취중진담을 들어주는 좋은 형이기도 합니다.

 

K씨. 저는 치료를 받았습니다. 초중학교 시절을 통째로 치료기관에서 보내기는 했지만, 아무튼 지금의 저는 타인의 표정이나 억양에 따라 타인의 감정을 분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물론 그게 사람에게 어떤 의미에서, 어떤 느낌으로 중요한지는 여전히 전혀 공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표정을 찡그리면 안 좋은 것, 거부하고픈 것과 같은 심리를 느낀다는 정보들은 습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감정변화의 분류에 따라 적절한 행동수칙들을 사용하는데 숙달되어 있습니다. 동기가 아닌 결과가 윤리적 판단의 척도로 볼 수 있다면, 저는 지극히 윤리적인 사람입니다. 절 ‘정상’이라고 표현해도 될는지요?

 

K씨. 말이 나온 김에 제가 당신과 왜 사귀는 지에 대해서도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에 대한 저의 첫 심리적 반응은 K씨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사랑의 설렘’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얼굴이 남들로부터 예쁘다는 평가를 받는 점을 알았고, 당신은 여자 친구로 삼는다면 주위에서 저에게 부러움의 시선이 쏟아질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에겐 처음의 당신은 단순한 과시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성욕도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습니다. 저는 정보를 모았습니다. 당신의 심리를 분석했고요, 인터넷을 통해 당신의 신상정보를 파악했습니다. 친구관계망과 당신의 동선까지도 파악했다고 말한다면 소름이라도 돋으실는지요? 하지만 사실이랍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저는 계획을 짰습니다. 초반에 저는 당신을 짧은 간격으로 여러 번 만남으로써 만났을 때의 어색함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다시 만날 날을 위해 당신이 저를 상상하는 재미에 빠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상상은 자유롭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욕망에 따라 저를 마음대로 왜곡해서 그려볼 수 있죠. 모든 인간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그리는 그 사람에 대해 사랑에 빠지는 법입니다. 저는 이 심리의 메커니즘을 알고 있었고, 당신에게 그대로 대입했습니다.

 

익숙함을 만드는 데는 2주가 걸렸습니다. 그 뒤부터는 만났을 때 같이 있는 시간을 늘렸습니다. 두 달이 지나갔을 때는 약 2주 간격으로 새로운 데이트 코스가 간략한 선물과 같은 이벤트를 계획해서 사용했습니다. 중간에 집안에 우환이 있어 걱정하는 연기를 해서 당신의 동정심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00일이 넘어갔을 때, 당신은 저에게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간단히 술자리 이후 취기를 이용해서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아니, 제가 섹스를 성취해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군요. 모두 계획대로였습니다. 감흥? 죄송합니다만, 솔직히 당신을 정복했다는 지배욕 이상의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입에 담았던 ‘사랑’은 연기였습니다. 섹스를 위한 수단이었다고 표현한다면 당신에게 너무 잔인한 것일까요?

 

과시와 성욕. K씨, 당신은 저에게 이 두 가지 키워드로 모두 설명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죄송합니다. 제대로 된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다고 했으면서 죄송하다는 사과가 무슨 소용이냐고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연기하지라도 않으면 제가 무슨 괴물처럼 느껴질 것 같아 불안하답니다. 저는 인간이고 싶습니다. 늘 노력하지만 쉽지 않죠.

 

저는 당신과 1년을 만났습니다. 그동안 당신은 저에게 충실했습니다만, 솔직히 저는 거기서 고마움 같은 감정을 느끼진 못한답니다. 사실판단은 가능하지만 가치판단은, 저 같은 인간에겐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래도 뻔질나게 지껄여온 행복하다, 고맙다 따위의 말들이 다 거짓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다만 그 말들이 그 상황들에 적절한 말이라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진심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느끼는 것 보다는, 그것을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 지가 중요한 것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제 말을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표현하다면 제가 가증스러운 것일까요?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적으면 적을수록 죄송한 게 참 많군요.

 

하지만 엊그저께 당신이 감기몸살로 자취방에 쓰러져 나오지 못했을 때, 당신 감기약을 사러 약국으로 갈 때, 그때 저는 뛰어갔습니다. 걸어가든 뛰어가든 약을 먹고 몸을 회복하는 시간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날도 더웠고요, 약국을 가던 그 시간은 상대수업이 하나 있던 시간대였습니다. 걷는 게 더 합리적이었음에도 저는 뛰었고, 수업도 무시했습니다. 약봉지를 사들고도 당신 자취방까지 뛰어서 갔습니다. 저는 제가 느낀 이 다급함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과시와 성욕이 저를 뛰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느낀 이 불안감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군요. 거울이 있어 당신 자취방으로 뛰어간 제 표정을 볼 수만 있었다면, 제가 느낀 심리를 알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풀리지 않는 의문이고, 하나의 혼란입니다. 당혹스럽군요.

 

사실 저는 빠른 시일 안에 당신과 헤어질 계획을 하고 있었답니다. 과시가 목적이라면 당신처럼 예쁜 여자에게 이별을 선고하고 더 예쁜 여자와 새로운 만나는, 이를테면 나쁜 남자 이미지가 더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물색해놓은 새로운 여자 C씨는 외모적으로 당신보다 우수하기도 하고요. (비율이 참 우수하더군요.)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유학원을 운영하신다고 하더군요. 그녀를 잘만 이용한다면 값싼 가격에 어학연수나 유학 같은 것들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분석컨대 지금의 K씨 당신보다는 C씨가 타산적 가치가 더 높습니다. 액면가가 더 높다고 표현한다면 당신에게 모욕적일까요?

 

하지만 저는 지금 이런 제 계획을 망설입니다. 계획을 세울 만큼 지성을 활용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이미 세운 계획을 망설이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것도 저에겐 이해할 수없는, 하나의 경이로움이군요. 이것은 필시 당신에게 약봉지를 사들고 뛰어간 그날의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일 테지요.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망설여집니다. 사랑의 표정은 성적쾌감의 표정과 과시욕이 충족됐을 때의 표정과 물질적*정신적 이득을 얻을 때 사람일반이 느끼는 표정과 움직이는 근육이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이거든요. 저는 감정의 분류 값으로써 ‘사랑’이라는 것이 유효한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글이 길어집니다. 확실한 것은 불안과 망설임입니다. 이 와중에 갑자기 이런 저의 본모습을 모조리 K씨 당신에게 고백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어서 이렇게 글을 써봅니다. 진실 된 고백이 기대하는 이해를 이끌어낼지도 모른다고 마음대로 단정지어버린 걸까요? 아니면 제 심리에 대한 궁금증의 답을 찾고 싶어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잡하군요. 그동안 복잡할 것 하나 없던 삶이었건만.

 

그만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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