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윤택 연출가 |
매서운 눈과 걸걸한 목소리 그리고 ‘내가 이윤택이다’라는 알 수 없는 포스. 그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는 건 하얀 백발뿐이다. 사실 그마저도 그의 비범함을 더하는 것만 같다.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역시 연극계 거장이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런 포스를 내뿜는 이윤택의 인생, 그의 20대가 궁금했다.
연극, 언제부터 꿈꿨나?
3대독자에 누나는 나보다 15살이나 많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부터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이 뭔지 고민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만화책으로 동네 친구들을 꼬드겨 함께 놀았고 중학교 일학년 때는 나 혼자 동네 꼬마들을 모아서 그룹과외를 했다. 그러다 그 아이들과 함께 연극한 것이 내 연극의 첫 시작이다. 그때는 연극이 뭔지도 모르고 했다. 그냥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한거니까. 그 후 고등학교 때는 합창단, 검도부, 종교단체, 사상단체 등 많은 활동을 했다. 당시 백일장에서 상을 타 문예반에 입단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그룹의 특성상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라 싫어했다. 그렇게 많은 활동을 했지만 공허했다. 사람들마다 생각이 달라 마음을 맞출 수 없었고 스포츠는 경쟁이라 누군가를 이겨야 했기 때문에 싫었다. 그중 가장 매력적인 활동이 연극이었다. 각자 개인이 커다란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서로 다른 타인이 모여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연극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다.
이윤택의 연보를 살펴보면 버라이어티하다. 그러나 20대에 두드러진 연극 활동은 없는 것 같은데 20대 때 도대체 뭘 했나.
내가 20대일 때는 ‘클래식음악다방’에서 하루종일 클래식 음악을 듣고 상상하고 책을 읽고 이야기했다. 80원짜리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매일 6년 동안. 그 시절 문학, 미술, 연애에 관한 끝없는 토론을 했다. 한번 이야기하면 6-7시간씩 해서 목이 퉁퉁 부을 정도였다. 그 곳은 흔히 말하는 살롱문화의 근원이었고 젊은이들의 예술 장소였다. 그런 카페가 있었기에 치열하고 본질적인 사색이 가능했겠지. 또 내가 한 일은 프랑스문화원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영화들을 끊임없이 본거다. 일반사람들이 보면 지겨운 영화가 내겐 기쁨과 즐거움이었다. 나는 그런 자유롭고 낭만적인 생활 속에 6년 동안 푹 잠겨 있었다. 20대 절반을 그렇게 보냈다. 누군가 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라고 말한 적 있다. 그 이유는 타 연극무대보다 무대의 구성변화가 심하기 때문이다. 그 변화들은 음악적 구성을 통해 이뤄졌다. 6년 동안 클래식만 들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런 시절을 살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 밑천으로 지금까지 왔다.
6년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살아가는 것. 자유롭긴 하지만 불안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때 유행했던 게 자살이다. 당시 틈만 나면 자살한다고 말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집 이사를 도와주고 삼일 후에 자살했다. 그때 그 친구와 같이 밥을 먹는데 너무 맛있게 먹길래 ‘자살할 놈이 밥을 왜 먹냐’ 물으니 ‘갈 땐 가더라도 배고픈데 먹어야지’라고 말하더라. 그 죽음은 지금의 자살과 다른 선택적 자살이다. 살 필요가 없다는 거다. 당시 20대 자살의 역사도 있다. 1950년대에 한 대학생이 브란덴부르크의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자살하는 과정을 기록한 사건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학생이 쓴 글은 ‘아 1분이 지났다.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뭐 이런 글. 그 뒤에 많은 사람들이 그 음악을 틀어놓고 자살했다. 당시 나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음악을 들으며 자살을 시도했는데 그걸 본 친구가 날 살렸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서울연극학교 중퇴, 부산일보사에 입사 후 사퇴, 서울에서 연극이 흥행했지만 밀양으로 복귀. 다양한 것을 시도했고 과감하게 버릴 때도 있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나?
글쎄. 죽음이다.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느냐의 문제는 열병처럼 치룬 20대 나의 화두였다. 해결방법은 여러 가지다. 제일 쉬운 방법은 절대자에게 의존. 또 다른 방법은 사랑 혹은 권력과 돈. 내가 선택한 법은 어차피 죽어야할 인생을 다양한 방법으로 놀고 가자는 플레이다. 쉽게 말하자면 몇 십 년 만에 찾은 부산일보 신문사는 끔찍했다. 당시 내가 쓰던 책상과 함께했던 사람들은 머리만 폭삭 늙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더라.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재밌게 놀았는데 이 사람들은 이곳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덧붙여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포기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역시 중요하다. 포기하고 다시 도전한다면 비범하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거고 꿈만 꾼다면 평범한 삶이겠지.
길고긴 백수 시절과 다양한 삶들을 거쳤기 때문에 지금의 이윤택이 탄생한 것 같다. 이윤택 연극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내 연극을 보통 이상주의 공동체 연극이라 한다. 이데알리즘, 플라톤주의다. 나의 연극은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 삶의 유토피아다. 이것이 이상주의 연극이다. 또 다른 특징은 공동체주의다. 혼자서는 살수 없다. 문화공동체주의, 공동체연극을 지향한다. 이런 나의 연극을 탄생하게 한 문화생산의 기반은 지역과 방언이다. 부산에서 태어난 것은 내 자부심이다. 그래서 연극 대사에 부산사투리를 그대로 쓴다. 방언은 굉장히 솔직하고 강력한 힘을 지녔다. 또한 에너지가 강하며 리드미컬한 음악적인 구성으로 이뤄졌다. 이러한 모든 것이 잘 버무러진 것이 나의 연극이다.
오구. 이윤택하면 빠질 수 없는 대목이다. 왜 굿이란 소재를 사용했고 초연 당시 반응은 어떠했나.
육 십 년대 언어는 우리나라 말이 아니라 영어 번역투의 말이었다.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지식인들이 진정한 우리나라 말을 찾아 나섰고 굿이 우리나라 말의 원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의 문학, 언어, 음악, 무용, 연극, 영화 그 모든 것이 우리의 굿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문화의 원형인 굿을 연극의 소재로 차용하게 됐다.
초연 당시? 대박이었다. 대중적으로 흥행하면서 기성연극에 펀치도 날렸다. 당시 오구의 굿 논쟁은 유명했다. 기성세대는 이 연극이 불경스럽다고 했다. 그들의 요지는 엄숙해야할 굿을 왜 이렇게 코미디 개그로 표현했냐는 거다. 나는 굿이 어떻게 엄숙하냐고 반격했다. 굿은 친숙한 것이었고 실제로 굿판에서는 조용필 노래 등 유행가를 섞어 부르기도 한다. 80년대 무당들의 제2의 직업이 카바레 가수라는 것만 봐도 뭐.(웃음) 결과적으로 내가 승리했다. 그때 그 시절 연극들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이제는 비주류가 아닌 주류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는데 문화게릴라란 별명이 껄끄럽지는 않나.
게릴라라는 호칭은 88년 기형도 시인이 처음 붙였다. 원래는 좋은 의미로 붙인 말이 아니다. 서울 연극의 주류를 이루던 사람들이 나를 주류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니까. 당시 내가 서울에 올라갔을 때 ‘지역에서 올라온 이윤택이 기존 연극 간판 다 떨어뜨린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니 그 호칭이 좋아지더라. 기존이 아닌 신예의 도약, 게릴라의 주류 진입, 이런 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20세기 한국연극사가 오태석과 이윤택으로 정리되는 분위기 속에 연극계 거장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닌 건 사실이다. 그래도 나는 게릴라다. 게릴라란 호칭은 삶과 문제의식에 관한 문제다. 나는 지금도 우리나라 문화의 수도인 서울이 아니라 밀양에 있다. 그리고 여기서 연극촌을 이뤘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루마니아, 콜롬비아 등 많은 국가에서 연극을 상연하더라. 우리나라 연극이 외국에서 먹히던가.
먹히는 것 같다.(웃음) 가장 한국적인 인식과 신념을 끌어냈을 때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진다. 음악에서 그 보편성을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세계적인 음악가의 인디언 음악이 한국의 굿과 통하는 점이 있다. 또한 샤먼족인 한국민족은 신명과 풀이의 지혜, 철학, 양식을 지녀 한국연극만의 독자성 역시 갖춰져 있다. 햄릿은 이를 잘 살린 작품이다. 서양에서는 흔히 햄릿을 광인이라 묘사하지만 우리는 접신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미친 것이 아니라 신들린 것. 유령과의 만남이 아니라 샤먼의 형태 중 하나인 굿으로. 이러한 점이 바로 한국 연극의 세계화를 이룰 수 있는 발판이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부대신문 인물면 공통 질문이다. 당신의 20대를 상징할 수 있는 단어는?
백수. 자유로운 백수다. 백수 시절은 자유로운 상상과 꿈꾸기의 시절로 자유인이 반드시 거쳐야할 통과의례다. 현재 대학생은 88만원의 노예다.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과 마주보기 전 자기기준을 세워라. 그리고 세상을 선택해야하라. 자기기준을 세우는 일은 자유로운 백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도 나는 누구의 간섭도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내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그 점이 나 스스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오늘날 20대들에게 말하고 싶다. 백수를 당당하게 받아들여라. 그리고 죽쳐라. 죽치고 꿈꿔라.
원문출처 : 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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