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큼 기술 문명이 고도화된 오늘날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도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사람들은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자신의 상황을 알리기도 하고 인터넷 채팅을 통해 비대면적인 의사소통을 하기도 한다.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이 앞 시대와 비교하여 굉장히 다채로워지고 그 양도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결국은 타인과 나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가 발생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의 존재는 사물과 마찬가지로 우연한 존재다. 다만 사물과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이 없는 사물을 ‘즉자존재’라 하고 의식이 있는 인간 존재를 ‘대자존재’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의식하고 자유로이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기에 즉자존재가 될 수 없는데도 타자의 시선은 인간을 사물처럼 고정시킬 위험이 있다. 타자의 시선은 자신을 규정하고 판단하므로 자신의 존재는 타자에게 달려 있고 타자의 시선은 본인에게 지옥일 수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타자는 자신과 대립하고 끊임없이 투쟁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관계 중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떠한가? 사르트르 식이라면 사랑도 불가능한 것이 돼버리는가? 두 사람은 결국 화해할 수 없는 존재인가?
이 글에서는 사르트르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다뤄보자 한다. 구체적으로 영화 <You Call It Love>(클로드 피노토 감독, 1988)에 나타난 주인공 에드워드와 에스페라의 사랑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사랑의 관계에서 타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커질 경우 두 남녀는 흔히 서로를 변화시키려 한다. 이런 욕구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확립하기 위해 상대가 자신만을 위해 살았으면 하는 이기심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타자의 자유를 자신의 것으로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랑의 관계에서 상대를 제압해 자신에게 굴복시키려 하는 ‘사디즘’적 방식이든 타자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을 희생해 상대의 이기적 마음을 모두 받아주려 하는 ‘마조히즘’적 방식이든 어느 한쪽을 잃는 점에선 모두 불균형적인 형태의 사랑이다.
영화 <You Call It Love>의 두 주인공 에드워드와 에스페라는 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작곡가인 에드워드는 연애와 직업 및 모든 면에서 자유로운 성향을 띠며 스키장에서 첫눈에 반한 에스페라에게 무작정 쫓아가서 만나자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기도 하다. 반면 에스페라는 교사이면서 대학 교수 자격시험을 치르고 있는 학생으로 호감이 가는 남성과 데이트할 때조차 시간 계획을 세우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속옷까지 신경 쓰는 꼼꼼한 여성이다. 서로에게 단시간에 사로잡히지만 두 사람은 자꾸만 어긋난다. 에스페라는 자신에게만 집중하지 않는 에드워드에게, 에드워드는 늘 자기 얘기만 하는 에스페라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두 사람 모두 상대가 자신을 좀 더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이는 타자를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려는 형태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두 사람을 모두 지치게 하지만 둘은 서로를 원하기에 그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에스페라는 대학 교수 시험의 최종 관문인 구두시험에서 몰리에르의 문학과 관련한 연구발표를 하는 가운데 자신의 현재적 문제와 관련한 해결의 전망을 발견한다. 발표를 통해 에스페라는 상대의 단점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사랑은 자존심과 자기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상대가 나를 변화시키려는 것도 결국 나를 사랑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면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타자의 자유를 보존시키는 동시에 타자와 합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자체가 원래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와 하나가 되기 위한 시도로서 타자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타자의 단점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면 타자를 계속해서 곁에 두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사랑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대자존재가 대타존재를 만나 그와 하나가 되고자 시도하는 것은 불완전을 극복하려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타자가 하나 되려 할 때 서로 다른 두 가지 욕망이 충돌하기 때문에 사랑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이상 자체가 사랑의 동기며 목적이고 가치라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지 않은 타자를 제시해 대자존재인 인간을 무한한 외로움에 빠트렸지만 동시에 상호주체성 개념을 통해 두 대자존재간의 사랑의 가능성도 열어준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완전한 사랑이 가능한 것이라면 수많은 남녀 간의 갈등과 불화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사르트르는 사랑하는 두 남녀사이에 다툼이 생겨나는 이유를 설명해줬다. 그 답은 정말로 간단하게 ‘사랑하니까’다.
원문출처 : 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2045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의 존재는 사물과 마찬가지로 우연한 존재다. 다만 사물과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이 없는 사물을 ‘즉자존재’라 하고 의식이 있는 인간 존재를 ‘대자존재’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의식하고 자유로이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기에 즉자존재가 될 수 없는데도 타자의 시선은 인간을 사물처럼 고정시킬 위험이 있다. 타자의 시선은 자신을 규정하고 판단하므로 자신의 존재는 타자에게 달려 있고 타자의 시선은 본인에게 지옥일 수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타자는 자신과 대립하고 끊임없이 투쟁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관계 중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떠한가? 사르트르 식이라면 사랑도 불가능한 것이 돼버리는가? 두 사람은 결국 화해할 수 없는 존재인가?
이 글에서는 사르트르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다뤄보자 한다. 구체적으로 영화 <You Call It Love>(클로드 피노토 감독, 1988)에 나타난 주인공 에드워드와 에스페라의 사랑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사랑의 관계에서 타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커질 경우 두 남녀는 흔히 서로를 변화시키려 한다. 이런 욕구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확립하기 위해 상대가 자신만을 위해 살았으면 하는 이기심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타자의 자유를 자신의 것으로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랑의 관계에서 상대를 제압해 자신에게 굴복시키려 하는 ‘사디즘’적 방식이든 타자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을 희생해 상대의 이기적 마음을 모두 받아주려 하는 ‘마조히즘’적 방식이든 어느 한쪽을 잃는 점에선 모두 불균형적인 형태의 사랑이다.
영화 <You Call It Love>의 두 주인공 에드워드와 에스페라는 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작곡가인 에드워드는 연애와 직업 및 모든 면에서 자유로운 성향을 띠며 스키장에서 첫눈에 반한 에스페라에게 무작정 쫓아가서 만나자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기도 하다. 반면 에스페라는 교사이면서 대학 교수 자격시험을 치르고 있는 학생으로 호감이 가는 남성과 데이트할 때조차 시간 계획을 세우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속옷까지 신경 쓰는 꼼꼼한 여성이다. 서로에게 단시간에 사로잡히지만 두 사람은 자꾸만 어긋난다. 에스페라는 자신에게만 집중하지 않는 에드워드에게, 에드워드는 늘 자기 얘기만 하는 에스페라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두 사람 모두 상대가 자신을 좀 더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이는 타자를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려는 형태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두 사람을 모두 지치게 하지만 둘은 서로를 원하기에 그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에스페라는 대학 교수 시험의 최종 관문인 구두시험에서 몰리에르의 문학과 관련한 연구발표를 하는 가운데 자신의 현재적 문제와 관련한 해결의 전망을 발견한다. 발표를 통해 에스페라는 상대의 단점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사랑은 자존심과 자기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상대가 나를 변화시키려는 것도 결국 나를 사랑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면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타자의 자유를 보존시키는 동시에 타자와 합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자체가 원래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와 하나가 되기 위한 시도로서 타자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타자의 단점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면 타자를 계속해서 곁에 두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사랑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대자존재가 대타존재를 만나 그와 하나가 되고자 시도하는 것은 불완전을 극복하려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타자가 하나 되려 할 때 서로 다른 두 가지 욕망이 충돌하기 때문에 사랑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이상 자체가 사랑의 동기며 목적이고 가치라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지 않은 타자를 제시해 대자존재인 인간을 무한한 외로움에 빠트렸지만 동시에 상호주체성 개념을 통해 두 대자존재간의 사랑의 가능성도 열어준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완전한 사랑이 가능한 것이라면 수많은 남녀 간의 갈등과 불화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사르트르는 사랑하는 두 남녀사이에 다툼이 생겨나는 이유를 설명해줬다. 그 답은 정말로 간단하게 ‘사랑하니까’다.
원문출처 : 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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