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프랑스 등 나이 들수록 책 더 읽는데, 우린 정반대
- 대학교수 "학생들, 책 소화 못해… 독후감 1~2장도 쩔쩔"
-"한국의 지식농사 깊이 얕아져, 의심하고 묻는 능력 저하"
대한민국이 얼마나 무식해지고 있는지,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의 탄식부터 들어보자.
“중학교 올라가는 순간 더 이상 입시와 무관한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책 읽으면 손해라고 생각하죠. 그러니 대학 들어가서는 좀 어려운 책은 읽지를 못합니다. 읽어도 취업서입니다. 뭐, 한마디로 대한민국이 무식해진 거죠. 교양의 암흑기랄까요. 이런 현상이 어떤 종류의 인간을 만들어 낼 거냐 하면 생각하지 않는 인간, 태도가 없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앞으로가 뻔한 거예요. 표피적인 사회, 질문과 호기심이 사라진 사회... 무식한 대한민국이죠.”
진화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장 교수는 “책 안 읽는 시대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암울하다”고 말했다. 그는 ‘책 안 읽는 시대’라고 말했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책을 못 잡게 하는 시대’ 그래서 ‘무식을 권장하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문학코너를 기웃거리던 대학생조차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면서 취업코너로 돌아서고 있으니 말이다. 책 안 읽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짚어본다.
◇ 공부에 도움이 안되면 안읽는다
'중학생을 위한 국어어휘력 만점 공부법'. 지금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읽고 있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YES24 청소년 베스트셀러 1위이다. 중학교 국어교과에 나오는 어휘들을 ‘믿기지 않겠지만, 저절로’ 외울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공부고수 3인의 비법을 담았다는 '이것이 진짜 공부다', 인문학 고전을 요약한 '고전은 나의 힘 세트', 디베이트에 사용되는 꼼수를 담았다는 '10대를 위한 유쾌한 토론교과서'도 10위권에 포진해 있다. 한마디로 국어단어와 고전요약 외우고, 토론꼼수와 공부기술 익히는 것이 청소년들의 책읽기 목표인 셈이다.
선진국 청소년들은 어떤 책을 가장 많이 읽는지, 미국과 영국의 아마존 베스트셀러 목록을 찾아보았다. 양쪽 모두 1위가 'The Fault in Our Stars(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말기암 환자인 두 청소년이 ‘우리는 이 세계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라며 삶과 죽음에 대해 던지는 고민을 다룬 존 그린의 장편소설이다. 또 감정과 기억이 통제된 디스토피아 사회를 다룬 로이스 로리의 소설 'The Giver(기억전달자)'도 많이 읽히고 있다. 한국 청소년들이 공부의 기술을 읽고 있을 때 미국과 영국 청소년들은 삶과 죽음, 그리고 사회를 읽고 있는 것이다.
서초구 한 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이모군도 “한 친구가 쉬는 시간에 '해리포터'를 읽다가 압수당했다. 선생님이 머리를 툭툭 때리며 ‘수학 문제나 하나 더 풀라’며 가져갔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문제집이 아닌 책을 읽고 있으면 다들 한심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책 읽기가 한심해졌고, 책 읽는 학생이 오히려 배제되는 것이 2014년 현재 대한민국 중고교 교실의 풍경이다.
◇취업에 도움이 안되면 안읽는다
대학 강의실 풍경은 더 심각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양대 사회학과 한 교수는 “학생들이 (독해력이 달려서) 아예 못 읽더라”고 개탄했다. “입학면접 할 때는 ‘독서를 많이 했다’고 강조하는데, 실상 까보면 거기서 거기다. 리포트도 아니고 1~2장 독후감 쓰는 것도 힘들어 한다. 대학원생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인문계열 대학원은 무조건 책으로 시작해서 책으로 끝나는데, 책을 도저히 소화하지를 못한다. 답답하다. 도무지 훈련이 돼 있지 않은 것 같다.”
책 읽으면 상금을 주는 행사까지 개최해야 할 정도이다. 한양대는 10권을 선정해 본문에 대한 문제를 많이 맞히는 학생에게 최고 200만원 상금을 지급하는 ‘독서골든벨’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당초 독후감 대회를 열었다가 일부 학생이 인터넷에서 짜깁기한 독후감으로 우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단답식 문제 맞히기로 바꾸었다. 성균관대, 중앙대 등도 유사한 행사를 진행 중인데, 교수들은 “오죽하면 중고생 ‘도전골든벨’을 흉내 내겠나”라는 반응이다.
청소년들이 공부에 도움이 안 되면 안 읽는 것처럼, 대학생들도 취업에 도움이 안 되면 안 읽는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김모(25)씨는 “대학생들에게 책은 사치이다. 취업준비만 해도 빡빡하다. 읽어도 인문학 상식을 모아둔 문제집이다. 소설을 집어 들다가도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하면서 돌아선다”고 말했다. 오찬호 서강대 연구교수는 “취업이 워낙 힘드니까 책 읽기도 ‘취업에 유리한지 아닌지’로만 접근한다. ‘이게 뭐 필요해?’ ‘그래서 어쩌라고?’ 이런 식이다. 이런 잣대를 들이대면 읽을 책이 없다. 책에 대한 촉수, 생각에 대한 촉수가 퇴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학에서도 책 읽고 토론하는 것이 더 이상 ‘쿨하지’ 않은, 이상한 모습이 돼버린 것. 서강대 경영학과 이모(23)씨는 “책을 읽고 이야기라도 하려면 ‘너 왜 이렇게 진지빠니’라는 반응이다. ‘재미없는 사람’으로 찍히고 만다. 책 이야기 자체를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생각에 대한 촉수는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
◇책을 못 잡게 하는 나라, 잡게 하는 나라
흥미로운 것은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다른 선진국들의 독서의 라이프사이클은 한국과는 정반대라는 것. 한국이 유아나 초등 때 바짝 읽다가 연령이 높아질수록 안 읽는다면, 이들 나라는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읽는다. 한 출판 관계자는 “한국 부모들은 어릴 때 독서를 많이 시켜야 상위 1%에 진입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옆집 아이와 경쟁적으로 책을 사주고 읽힌다.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 선진국들은 독서가 그냥 습관이다”고 말했다.
영국의 조사기관 DJS리서치에 따르면, ‘매일 책을 읽는다’는 비율이 여자는 18%(18~29세)→31%(30~44세)→32%(45~59세)→48%(60세 이상)로 높아졌다. 60세 이상 여성 가운데 절반이 매일 책을 잡는다는 것. 남자도 14%→22%→27%→31%로 나이가 들수록 많이 읽는다. 프랑스 국민들은 휴가시즌이 되면 TV시청도 줄이고 책을 읽는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IFOP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들은 1년에 평균 11권(만화제외)을 읽는데, 여름휴가 동안에만 3권을 읽는다. 휴가기간에는 TV시청이나 인터넷서핑을 평소보다 1시간씩 줄이고, 독서에는 25분씩 늘어난 2시간14분을 매일 할애한다. 휴가라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 읽기를 위해 휴가를 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
스마트폰이 한국만 대세가 아닐 텐데, 독서행태가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들 나라에서는 책을 읽지 않으면 대학에 들어갈 수도, 졸업할 수도 없는 교육구조의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현재 영국 더럼대학교에 재학중인 김헬렌(22)씨는 “독서의 깊이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한국 학교에서는 발췌문을 읽었는데, 미국에서는 1년에 5~6권은 완독해야 수업을 따라간다. 영국은 미국보다 더 많이 읽어야 하는데, 친구들이 남는 시간만 있으면 책을 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웬만한 영국인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은 다 알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미국 등 외국대학으로 유학을 간 한국 학생들이 힘들어 하는 것도 바로 책 읽기와 쓰기 때문이다. 최근 미 예일대를 졸업한 유학생 이모(25·여)씨는 “영어는 둘째 치고 일단 사고하는 방식부터 송두리째 바꾸는 연습을 해야 했다. 비판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 책을 읽고 말과 글로 의견을 표현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데, 한국에서 이런 훈련을 받지 못해서 대학 다니는 내내 힘들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웬 책이냐고?
책 읽기는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 미래의 결실을 위해 깊숙이 씨를 뿌리고 묵묵히 가꾸는 것. 하지만 연세대 경제학과 홍훈 교수는 “현재 대한민국 지식의 농사는 깊이는 얕아지고 토양은 천박해지고 있다. 실용지식도 결국 기초지식에 근거하는 것인데, 책 읽기가 고갈되면 실용적인 지식조차 존립이 위태롭다”며 “질문하고 의심하는 기능이 저하하면서, 창의적인 혁신능력도 저하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술혁신의 중심 실리콘밸리만 해도 그 밑천은 독서와 관련이 깊다. 지급결제 시스템 ‘페이팔’에서 시작해 전기차(테슬라), 우주로켓(스페이스X)까지 진출한 엘론 머스크는 한 인터뷰에서 ‘어떻게 로켓까지 배웠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책벌레였다. 나를 잡으러 올 때까지 서점에서 책을 읽었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읽었다.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지면서 백과사전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줄곧 로켓에 대해 고민을 해왔다.” 그가 지금껏 읽은 책은 1만여권에 달한다고 한다. 로켓과학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먹고 살기도 힘든데 웬 책이냐고? 맞다. 구조적으로 책을 손에 못 잡게 하는 시대인데, 독서의 짐을 개인에게 다 지울 수는 없다. 경남과학기술대 박종훈 교수는 “책 안 읽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교육과 기업이 스펙과 스킬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식을 갖춘 인재, 질문을 하는 인재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의식 없는 인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작가이자 사회학자인 정수복씨는 “학교는 책을 읽고 질문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의무적으로라도 수업시간 중 일부를 읽고 질문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기업은 객관식 시험을 없애야 한다. 얼마나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논술로 평가해야 한다. 그것이 결국 기업의 경쟁력이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교육과 기업이 지금의 ‘무식을 권장하는 시대’를 초래하고 있다면, 그 해결의 첫 단추도 어쨌든 교육과 기업이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10년 뒤 대한민국의 재앙을 막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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