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인문(어문)계 전공자인 A 씨는 금융권 취업을 목표로 삼고 있다. 직종 자체가 안정적이고 높은 연봉과 좋은 복지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졸업한 선배들을 살펴봐도 금융권에 취직한 선배가 제일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다수의 선배들은 아직도 취업문을 두드리는 중이다. 이런 ‘취업 재수생·삼수생’들이 해가 갈수록 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인문계라는 특성상 임용 고시를 준비하던 동기들이 꽤 많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임용 고시를 포기하고 취업 시장으로 돌아온 것까지 합하면 경쟁률은 더 높아져만 간다.
요즘 ‘취업 무적’으로 불리는 전공은
A 씨의 출신 학교는 흔히 ‘SKY’라고 부르는 서울 최상위권 대학이다. 4년 동안 받은 평균 학점은 4.02점으로, 만점이 4.5점인 것을 생각할 때 수업을 빼먹지 않고 열심히 들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게다가 취업 필수 스펙이라는 토익은 만점까진 아니더라도 고득점에 속하는 925점을 받았다. 또 실무에 적합한 준비된 인재라는 인상을 주고 싶어 방학 동안 펀드투자사 자격증과 개인재무설계사(AFPK) 자격증까지 땄다. 이 정도 스펙도 아직 부족한 것 같아 1년 동안 미국에 교환학생까지 다녀왔다. 이만하면 꽤 성실하게 학교를 다닌 것 같다고 자부하는 A 씨. 그러나 실제 취업 시장에서는 매번 서류 심사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광탈(광속 탈락)’하고 있다.
계속되는 불합격 통지에 답답해하던 A 씨는 취업 전문 커뮤니티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한다. 커뮤니티에 가입하자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가진 다른 취업 준비생들의 스펙이 공개돼 있다. 자기 위치를 알기 위해 살펴보니 특히 인문계 전공자의 평균 학점은 기본적으로 4점이 넘어야 하고 토익은 900점이 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심지어 지원 후기에는 5개 국어에 해외 인턴 경험까지 있는 사람도 떨어졌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한편 언론에서는 기업들, 심지어 금융권조차 점점 이공계 인력 위주로 채용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현대증권이 신입 사원 33%를 이공계에서 뽑는 등 금융권의 이공계 선호가 커진다”든가 “외국계 판이던 파생 금융시장에 점유율 5위를 차지한 KDB산업은행의 비결은 이공계 인력”이라는 보도를 들으면 이공계 전공자가 부러워진다. 자신의 전공을 좋아하고 적성에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만 특히 “서울 소재 공대 거의 100% 취업”이라는 기사를 보면 인문계를 선택했던 게 후회될 정도다.
현재 A 씨는 자기소개서도 꾸준히 첨삭받고 있지만 지나치게 높은 취업 장벽 때문에 의지를 상실한 상태다. 그래서 요즘엔 공무원 시험 정보도 찾아보고 있다. 현실에 지나치게 타협하는 것 같아 자조적인 마음이 들면서도 동시에 9급 공무원 합격도 감지덕지라는 생각이다.
사례 2. ‘남중-남고-공대-군대’라는 루트를 따라 살아 온 B 씨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 전공 수업 때문에 시간표가 빡빡하고 중간·기말고사 사이에 자잘한 시험이 많아 정신없이 지내지만 이공계라는 전공이 대체로 적성에 맞는다고 느낀다. B 씨의 전공은 ‘전화기(전기전자·화공·기계)’ 중 하나로, 요즘 취업 시장에서 ‘무적’이라고 불린다. 먼저 졸업한 선배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다양한 기업의 생산직부터 심지어 영업직까지 골고루 분포돼 있다.
B 씨가 다니는 학교는 통상 서울 하위권 대학으로 분류된다. 그 역시 수능 점수에 맞춰 왔다. 사실 지방 국립대에 원서를 넣어볼까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서울 소재 대학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졸업 시기가 다가올수록 대기업 생산직들이 지방 거점 대학 졸업생들을 선호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공장과 연구소가 주로 지방에 있기 때문이다. 산업 전선에서 뛰고 있는 졸업생 선배들의 조언 중 “이공계 인력은 지방대 출신이더라도 학점만 우수하면 취업이 어렵지 않다”는 말도 종종 들린다.
4년 동안 B 씨가 받은 평균 학점은 3.79점이고 토익은 방학 동안 바짝 공부해 825점을 받았다. 주변 친구들 대부분이 기본처럼 따 두는 ‘컴활(컴퓨터활용능력)’과 모스(MOS) 자격증은 그 역시 일찌감치 따 놓았다. 대외 활동이나 공모전 경험은 없다. 동기들을 둘러봐도 그런 스펙보다 차라리 자격증을 더 따거나 자기소개서를 한 번 더 수정하는 게 낫다는 반응이다. 그래도 스펙이 조금 부족한가 싶어 유명 철강 기업인 P사 인턴에 지원했는데 한 번에 붙었다. 심지어 동기들 중에는 토익 점수가 아예 없는데도 1차 서류 심사를 통과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B 씨는 인턴 경험을 또 다른 스펙으로 쌓아 인턴 기간이 끝난 뒤 목표 기업에 도전할 계획이다.
지방 국립대 이공계 전공자 ‘귀한 몸’
최근 페이스북에서 ‘대기업 인사팀 18년 차의 조언’이라는 제목의 글이 많이 읽혔다. 글쓴이는 스스로를 대기업에서 인사 업무만 18년 하고 퇴직한 뒤 아내의 자영업을 돕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글이 유명세를 탄 이유는 이것저것 재지 않은 매우 단호한 어조 때문이었다. 글쓴이는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이 되기 위해서는 ‘공대를 가라”고 잘라 말하며 심지어 “지방 국립대 공대와 서울 상위권 대학 경영학과 중 공대가 이긴다고 단언한다”라고 극단적인 예까지 들었다.
예외가 있을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아서인지 “글의 내용은 허구”라고 반박하는 네티즌도 많다. 그러나 크게 봤을 때 이공계 출신을 우대하는 취업 시장의 특징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특히 연거푸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있는 인문계 출신들은 “문과를 가려면 최하 서강대 경영이 마지노선이며 그 밑으로 갈 것이라면 차라리 지방 국립대를 가라”는 부분에 자조 섞인 공감을 보이고 있다. 글이 큰 호응을 받자 글쓴이는 ‘문과 출신이 취업하는 방법’과 ‘이공계 출신이 취업하는 방법’을 연달아 작성하기도 했다.
회원이 161만 명이 넘는 네이버 카페 ‘독하게 취업하는 사람들’에는 ‘지원 스펙 조언’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취업을 준비하는 회원이 자신의 목표와 스펙을 가감 없이 올리면 다른 회원들이 보고 객관적인 시점에서 평가해 주는 코너다. 이곳에서도 이공계와 문과 전공자에 대한 조언이 극명하게 갈린다.
서울 중상위권 대학을 졸업할 예정인 아이디 홰홰홰는 평균 학점 4.05점에 토익 890점, 해외 봉사 활동과 교환학생 6개월에 금융 3종 자격증을 갖춘 문과 전공자다. 이 글에는 “상경계열 전공이 아니라 아쉽다”며 “금융 관련 자격증을 더 따라”는 댓글이 달렸다. 서울 중위권 여대를 졸업할 예정인 인문계 전공자 Aying의 스펙은 토익 870점, 신HSK 6급, 무역영어 1급, 유통 관리사 2급, 한자 2급, 컴활 2급이지만 넣는 족족 탈락이라며 조언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반면 지방 국립대 이공계생인 1989취업은 학점 3.9점에 토익 640점, 오토캐드 자격증 2급에 어학연수 1년의 스펙을 올렸는데 “스펙은 됐고 자기소개서 열심히 쓰면 되겠다”는 의견이 태반이었다. 또 이공계 전공자 lek의 글에는 “부산대 기계공학이면 스펙으로 충분하다”는 댓글이 달렸다.
상황이 이러니 취업 시장에 ‘슬픈 인문계’라는 표현이 돌고 있다. 단지 전공이 인문계라는 이유만으로 차별 받는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스펙이 아무리 높아도 안심할 수 없는 슬픈 인문계 출신들의 취업 전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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