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에서 만난 참 밝고 속 깊던 후배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봉사활동을 하며 만났던 똑부러지던 언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이후로 한동안 나는 몹시 두려웠다. 장례식장에서 환히 웃고 있는 그들 앞에 하얀 꽃 한 송이 올려놓으면서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대로 가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누구못지 않게 미래가 기대되는, 욕심 있는 청춘들이었다. 함께 한 잔 하며 세상 모든 이야기를 끌어 모아 떠들 때면 그들의 눈동자는 생에 대한 의지로 충만해 반짝여 괜히 나까지 덩달아 설레곤 했다. 충격에 속이 텅 빈 상태로 장례식장을 나오다 그제서야 불현 듯 내 곁의 보이지 않는 존재를 느꼈다. 죽음은 때와 사람을 가려서 오지 않는구나. 지금, 내 옆에 있구나.
‘사람이 죽는다는 건 확실한 일인데도 나는 죽지 않는다는 무의식의 신념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다.’
마르틴 하이데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불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삶을 소모한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다수가 자신은 ‘아직 어리다’며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대답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나 또한 그러했으니.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죽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나는 오만하게도 생을 허비함으로써 젊음을 과시하고 두려움을 망각하기 바빴다. 그러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몇 차례 경험하면서 그것이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 곱씹다보니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언젠가 이 삶의 마무리를 해야 하는 그 순간이 오면, 나는 그리고 내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할까? 최고의 마무리는 어떤 것일까?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고민의 끝에서 잘 죽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당신도 죽게 될 것이다. 이게 무슨 불경한 소리냐고?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 이것은 죽음을 믿지 않는 당신과 나를 위한 일종의 제안서이다.
01 죽음을 기억하라
Memento mori
인류의 과거는 지금보다 죽음에 더 가까웠다.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그의 저서 『죽음 앞에 선 인간』에서 라틴 그리스도교의 도상을 통해 시대별로 죽음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논한다. 그에 따르면 중세 초기에 사람들은 죽음을 개인의 것이 아닌 인류 공동의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우리의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허나 중세 후기로 들어서면서 개인주의로 변하게 되며 죽음의 주체도 이동해 ‘나의 죽음’이 된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하는 바로크 시대에는 죽음이 나와 멀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떨어질 수 없겠다는 생각의 공존이 ‘멀고도 가까운 죽음’을 불러온다. 그 후 낭만주의 시대에는 신앙보다 과학의 힘이 강해지며 과학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게 되어 ‘너의 죽음’으로까지 변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거쳐 결국 오늘날 죽음은 그 중 어떤 것도 아니게 되며 의학적으로 인식될 뿐 삶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시대는 매우 쉽게 죽음을 부인한다. 그리하여 이 죽음의 부인에 의해서 인간 존재에 관한 세계관의 뿌리를 부인한다...(중략)...우리들의 시대는 개인으로 하여금 죽음의 감정을 마치 무엇인가 흉측한 것이기나 한 듯 밀쳐내도록 부추기거나 혹은 그 같이 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말테의 수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또한 그는 20세기를 기점으로 죽음 역사의 판도가 바뀌었다고 주장하며 어떻게 죽음이 섹스 대신 주요한 금기 사항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로 20세기 전까지는 생산이 중요한 시대였기 때문에 생산 활동에 방해가 되는 섹스 등의 쾌락을 주는 행위를 금기시했지만 자본주의는 소비를 미덕으로 하기 때문에 소비와 쾌락을 조장하여 삶의 의미를 찾게 하고 죽음을 잊게 한다는 것이다. 소비사회에 접어들고 나서 자신의 가치, 삶의 가치를 더 많은 소비와 쾌락으로 치환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본주의가 아주 효과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적극적으로 망각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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