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노무현은 빈농의 아들이었다. 정의롭고 고집이 셌던 아버지가 일본인 마름을 했던 동네 유지와 이웃 사이의 소유권 분쟁에서 약자인 이웃 편을 들었다가 여러 번 폭행을 당했다고 회고하며, 당신의 아버지로부터 원칙과 소신을 지켜나가는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가난했던 삶, 막노동판에서 일을 하고 형들의 도움을 받으며 고졸학력의 신분으로 힘들게 사법고시를 합격한 뒤, 1년 동안 대전지법 판사로 일하다 변호사 시절을 보낸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적 사상이나 의식이 확고하지 않았던 노무현은, 1981년 정부의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의 변호인을 맡으며 사회의식을 갖추기 시작한다. 전두환의 통치 시대와 그의 정치 인생의 시작은 그렇게 궤를 같이 하게 된다.
1981년의 부림사건을 계기로 힘 없는 약자들의 대변인이자 거리의 변호사로서 활동하다가, 87년의 박종철 고문치사와 6월 항쟁,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따른 여파로 정치계에 입문하게 된다. 88년의 청문회 스타로 발돋움하지만, 특유의 솔직함과 원칙과 소신을 고수하는 성격으로 인해 3당 야합을 거부하고 낙선의 고배를 연이어 마시게 된다. 힘 있는 의원들 사이에서 그는 세력이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였지만, 자발적인 정치후원 모임인 ‘노사모’를 통해 그는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극적으로 올라가게 된다.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은 구별되어야 한다. 열정적이고 뛰어난 개혁가이지만, 정치인이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은 솔직함과 올곧음,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성향 때문에 무능했다는 이미지를 뒤집어 썼다. 노무현 전 대통령만큼 문제적인 논쟁을 일으킨 인물이 있을까? 인간 노무현을 폄하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정치인 노무현으로서는 ‘기품이 없다‘, ’대통령감은 아니다‘, ’경솔하다‘는 등의 평판을 얻어왔다. 이는 곧 투쟁에는 강하지만 네트워크 형성에는 무능했던 그의 정치력을 말해준다.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신념이 투철한 리더의 자질을 보여주지만, 정략적인 꾀를 제대로 활용 못하여 정국의 효율성을 떨어뜨렸다는 점에서 만능형 리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권위주의를 혐오했던 그였기에, 평등의 가치를 옹호하였고, 부정한 권위의식을 타파하려는 데에 노력하였다. 검찰과 언론 및 정치개혁에 공을 들였지만, 번번이 그의 의견은 묵살되거나 보혁갈등의 초점을 벗어나지 못해 발목을 잡혔다. 정권 초기의 대북송금 사건과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요구, 대연정 제안에 따른 결정은 지지세력을 떠나가게 만든 원인이 되었고, 선거를 앞두고 개인적인 지지발언이 문제가 되어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도 하였다. 이후에 대통령직을 이어가게 되어서도, 4대 개혁입법(국보법, 사립학교법, 과거사법, 언론관련법) 등의 보수층의 반발로 인하여 무산되었으며, 신행정수도 관련 사안을 추진하는 데에도 헌재의 위헌 판결로 인해 무산되었다. 열거한 실패 정책들은 보수 정치 및 언론 세력의 왜곡이나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전에 논의되었던 대통령 중임제 또한 정략적이라는 비판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다.
시민 노무현으로 돌아온 지 1년 반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정치 보복의 희생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2008년 100만 여 명이 참가했던 촛불집회는 이명박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고, 배후의 인물이 노무현일 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대통령 기록물 이관에 대한 이견과 노무현 주변 수십 여 명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검찰의 표적수사는 끝없이 노무현을 벼랑끝으로 몰고갔다. 2~3주면 끝날 세무조사가 몇 달씩이나 간 데다가, 지방에 지방국세청 대신 서울의 중앙청이 조사를 하고 노무현이 자주 가던 식당까지 세무조사를 당할 정도였으니 정치적인 보복이 상당한 수위였음을 알 수 있다. 일부 측근들의 (보수층의 새발의 피도 안될만큼의) 소소한(?) 비리혐의가 드러났지만, 노무현은 파내고 파내도 나오질 않으니, 검찰이 노무현을 소환하고 언론 왜곡 보도와 온갖 압력을 가하여도 혐의만 흘릴뿐 진술 외의 증거가 없으니 기소를 하지 못하였다. 결국, 부정한 이미지만 덧쓰게 된 노무현은 정치보복으로 인한 정신적인 타살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대화와 타협, 상대주의와 관용, 평등이라는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일반적 의미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 했지만, 매카시즘과 정치 편향에 따른 왜곡에 의해 한국 현실정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지역주의를 넘어서 화해와 정의를 추구하였으나, 기득권 세력의 끝없는 분란 조장과 진보층의 분열의 벽은 공고했다. 그렇게 노무현은 경제와 외교 및 안보 분야에 있어 업적을 이루었으나, 공은 박하게, 과는 부풀려져 평가되며 당시 시민들에게 무능한 이미지를 가지게끔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높게 평가될 것임이 분명하다.
노무현은 정의가 승리하는 세상을 꿈꾸었다. 부정한 방식으로 이익을 탐해온 기회주의자들을 물리치려 했던 정의로운 사회. 그는 당장의 힘겨루기에선 졌을지 몰라도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의 참된 승리자였다고 평가받을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워질 사람, 존경 받을 사람, 지사적 풍모를 가지고 약자들 편에서 끝없이 민주주의의 참된 가치를 추구했던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라 믿는다.
오늘은 노무현 서거 6주기를 맞이하는 날이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은 친노나 노사모가 아닌 '노무현의 정신'이다. 약자를 배려하는 것, 누구나 희망과 미래를 품을 수 있는 세상,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자유와 평등, 인권과 민주주의가 올바로 펼쳐진 세상,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
이 분 조차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근현대 정치 역사에서 정말 배울만한 점이 많은 사람이 바로 인간 노무현이라고 믿는다. 그의 부재가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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