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글주의) 연애와 상처의 함수에 대하여 - 곽정은

기쁜 야광나무2016.05.02 23:41조회 수 3094추천 수 12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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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매주 녹화에 참여하고 있는 프로그램 <마녀사냥>의 '그린라이트를 꺼라' 코너에선 연애를 하고 있는 와중에 생겨난 고민거리에 대한 생각을 많은 이들과 나눠보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억 남는 사연 하나가 있는데, 그건 바로 내가 늘 마음에 중요하게 품고 있는 두 단어, '자존감'과 '치유'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연은 이 년째 연애중이지만 은근히 그녀와의 관계에 지친 한 남자의 하소연으로 시작한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

 

이 자신을 컨트롤하는 모습에 반해 사귀기 시작했지만, 옷차림이나 화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두 시간 반

 

씩 처음부터 다시 준비를 하거나, 4박 5일간 함께 여행을 떠나도 민낯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이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얘기였다. 옆에서 아무리 예쁘다고 말해줘도 외모에 대한 강박 때문에 자연스런 데이트도

 

불가능하고, 마주치는 모든 여자들을 견제하고 모두 적으로 돌리는 태도 때문에 불편하다는 것. 그가 보내온 모든 문

 

장에는 괄호 안에 이 문장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자존감 낮은 여자, 진짜 문제 있지 않아요?'

 

 

 

  아무리 사연을 보내온 자가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자존감이 낮은 상태라면 둘이 정상적인 연애를 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그러니 이 관계는 헤어지는 것이 낫다'는 토크가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린라이트를 끄지 못했다. 사연 속 그녀가 자존감이 많이 부족한 것도 맞고, 그 상태로 계속 만난다면 남자가 여자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판단하긴 했지만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를 자꾸 생각하게 됐다.

 

 

 

  단지 예쁘게 태어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십대와 이십대를 관통하며 경험했을 외모에 대한 세상의 은근한 차별은 마음속에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고군분투해서 살도 빼고 자신에게 맞는 메이크업 테크닉도 알게 되었을 테지만, 과거에 받은 마음속 상처로, '예전 모습을 절대 들키면 안돼', '예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어'라는 생각으로 여자를 끊임없이 몰고 들어가곤 했을 것이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것에 차별받는 건 예쁘지 않게 태어난 한국 여자에게 그리 드문 경험도 아니다. 다만 그녀가 자신의 상처를 재빨리 치유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가 먼저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집 앞에 자신을 만나러 온 남자친구를 두 시간 반이나 더 기다리게 한 그 이기적임과 매너 없음을 비난할 수 있을지라도, 그녀의 낮은 자존감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연애하는 데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크다고. 마음이 건강한 사람과 연애를 해야 좀더 행복할 수 있다고. 물론 이 말은, 많은 경우 옳다. 자존감이 낮은 상태의 사람은 상대방의 호의를 곡해하기도 하고, 의존적이거나 혹은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연인을 당황시키기도 하니까.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소화기능이 현저히 떨어진 사람에겐 결국 소화불량만 일으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연애를 할 땐 감정의 영역이 더 지배적이 되기 때문일까? 자기가 갖고 잇는 트라우마를 오히려 자극하고 후벼파는 관계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양육된 딸이 어른이 되어서 아버지와 비슷한 성향의 남자를 선택한다든가하는)에 빠지는 일까지 있으므로,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건강한 연애란 공존하기 쉽지 않다고 말해도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친밀하고 사적인 애착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삶의 온기를 높여주는 일이기에 작고 슬펐던 기억을 잊는 데는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연애 상대라는 이유로 상대방의 정서적 문제를 다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연애를 배제한 다른 일상에서 '성취의 경험'을 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진심으로 사랑받고 인정받는 일이 연애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순간 비로소 '연애를 안 해도 꽤 행복하지만 연애를 해서 이 행복을 함께 나누고 싶은'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그 상태가 되면, 누군가를 만나 혹 또다른 종류의 상처를 입는다 해도 크게 절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단단한 내면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이 상처를 치유해줄 사람을 찾기 위해 눈을 크게 뜨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잇는 상처 그 자체에 눈을 크게 뜨는 것'도 중요하다. 내 상처의 크기가 어떻고 부위가 어떻고 진행상황이 어떤지, 집요하게 파고들어 혼자 서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도 필요하다면 당연히 받아야 한다.

 

 

  행복한 척, 아무 상처도 없는 척 자신을 가장하는 것은 마치 앞서의 사연 속 여자가 한 번 외출에 두 시간 반 동안 자신을 꾸미는 일과 같아서, 당사자는 늘 전전긍긍하고 지켜보는 사람은 진이 빠지는 일이 된다. 상처를 입은 자여서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없는 척 가장하는 자이기에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다. 완벽히 솔직하게 자신의 상처에 대해 눈을 뜬 바로 그즈음, 그 상처를 보여주어도 괜찮을 사람이 누구인지 판별할 수 있는 눈도 함께 열리게 마련이다.

 

 

사랑과 치유도 하나의 관계에서 모두 이뤄지길 원한다면, 자신의 상처를 인식하고 혼자 서는 것 그리고 절대 만나서는 안 되는 부류의 사람을 인식하는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만 한다.

 

 

  상처받은 사람들로 넘쳐나는 차가운 현대의 도시, 따뜻하게 충만히 사랑받고 싶은 그 마음이 온전히 이해받기 어려운 세상인 것은 틀림없지만, 치유의 황홀경을 접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다. 

 

 

  연애가 우리의 모든 상처를 치유해줄 순 없겠지만, 애초에 갖고 있던 상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사랑이 제각기 다른 길로 가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상처 때문에 사랑에 실패할 것인가, 상처로 인해 좋은 사랑을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인가. 답은 열려 있고. 우리들 각자에게 남겨진 시간이 그저 충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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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은, 교보문고,[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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