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1859년에 태어난 유태계 프랑스인으로 유태계였지만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성실함으로 그 공을 인정받아 군에서 복무하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빠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1894년 9월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에서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으로 가는 봉투 한 개를 입수하면서 그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바뀌게 됩니다. 봉투의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의 기밀사항이 기록된 명세서. 참모본부는 이 명세서의 필체를 추적한 끝에 참모본부에서 일하고 있는 드레퓌스 대위를 범인으로 지목하여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그 해 12월 군사법원은 비밀재판을 열었고 군부는 드레퓌스가 무죄로 판명될 경우 추락할 군부의 위신을 우려하여 여러가지 날조된 증거를 제출하였습니다. 결국 드레퓌스 대위는 무고함에도 불구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아프리가 적도 부근의 소위 '악마섬'에서 복역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 사건은 대중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끝난지 15개월이 지나 드레퓌스의 동기의 동기이자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는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다른 스파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드레퓌스 사건의 핵심 증거인 명세서를 작성한 진범을 알아내게 됩니다. 그 진범은 바로 보병 대대장 에스테라지 소령. 뒤늦게 밝혀진 진범은 드레퓌스 대위의 형에 의해 고발당하고, 드레퓌스를 비방하는 데 앞장섰던 신문 중 하나가 명세서 사본을 신문에 게재함으로써 온 세상이 진실을 알게 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스테라지는 재판 전 군부를 협박해 만일 자신을 버린다면 장군들을 물고 늘어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국방장관과 참모본부는 그의 신변을 보장한다고 약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진범인 그는 군부의 비호를 받아 군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오히려 진범을 고발한 피카르 중령이 군사기밀을 누설한 혐의로 체포당하고 맙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세계의 언론은 프랑스의 이같은 판결을 맹비난하였고 프랑스 내에서도 클레망소 등 일부 의식있는 지식인과 정치인을 중심으로 재심을 요구하는 세력이 형성되면서 프랑스의 국론은 두 쪽으로 나뉩니다.

에밀 졸라가 쓴 '나는 고발한다’를 1면 톱기사로 게재한 1898년 1월 13일자 <로로르>지
그러던 1898년 1월, 로로르(L'Aurore)지에 실린 편지글 하나가 프랑스 전역에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쓰는 서한의 형식으로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의 죄를 밝힐 것을 요구하며 그를 두둔한 군부를 비난하는 글을 게제한 것입니다. 이 날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이 글이 게재된 로로르지는 30만 부가 팔리는 기염을 토했고 전세계인이 에밀 졸라를 응원하는 전보와 편지를 3만 통 넘게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세했던 재심 반대파는 에밀 졸라를 맹비난하며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해왔고, 법원 또한 군사법원을 중상모략했다는 혐의로 에밀 졸라에게 징역형을 선고합니다. 반유태주의가 뿌리깊게 박힌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유태인을 옹호하는 소설가가 발붙일 땅이 없다고 생각한 에밀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해 8월, 갑자기 이 싸움의 대세가 급변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면서 피카르 중령을 모함하고 에스테라지 소령에게 유리하도록 문서를 위조한 앙리 중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점입가경으로 그의 자살 직후 진범인 에스테라지가 영국으로 도주하기에 이르는데, 그는 자신이 독일의 기밀을 캐내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했다는 등 자신이 이 사건의 진범이라는 내용이 담겨진 책까지 써냅니다.
이제 진실이 명백히 밝혀진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은 군부를 비난하였고 다시 열린 군사재판에서 드레퓌스는 정상을 참작받아 10년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이미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 그의 결백이 확실한 상황에서 여전히 징역 10년형이 선고되자 에밀 졸라를 포함한 세계의 언론은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였고, 이에 대통령은 1899년 9월 그를 특별사면합니다.
드레퓌스는 출소한 이후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하였고 1906년 7월 대법원이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약 13여년에 걸친 기나긴 법적 공방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군으로 복귀하여 프랑스에서 가장 영예로운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중령으로 진급하였으며, 1935년 7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의 핵에는 소수의 양심있는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군부 내에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 무고한 동기를 위해 끝까지 그의 편에 섰던 피카르 중령, 드레퓌스의 무고함을 알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글을 씀으로써 직접 행동으로 그의 결백을 밝히려 노력한 에밀 졸라, 그리고 자유와 진실을 위해 그를 옹호했던 당대 프랑스 국민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 사건은 단순한 스파이 사건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부러진 화살 보다가 언급되어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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