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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키 마사오 다카키 마사오 하시는데..

BrownSugar2012.12.05 00:12조회 수 2497추천 수 3댓글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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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에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그리고 사관학교에 들어간다면 창씨개명은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닌가요??
그리고 헌병대이긴 했지만 독립군과 싸우거나 독립군과 대립하는 그런 일은 안 했던 걸로 알고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건가요??
혹여 잘 못 알고 있는거라면 제대로된 진실을 근거에 기반 해서 알려주십사합니다.
그리고 이정토도 없어졌겠다 이제 뉴스퍼나르고 하는 것도 줄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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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재활의학/스포츠생리학 기말고사 언제인지 아시는 분~ (by hgw901) 패딩 덕 다운, 구스 다운 추천요. (by 답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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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카키 마사오는 안되고 도요타 다이쥬는 괜찮은 불편한 진실


    아까 다카키 마사오에 대해서 글쓴 어느분은


    지 좋은거에는 댓글 다달고 도요타 다이쥬는 입싹 닫드라구요 ㅋㅋ

  • @강건마

    잘못달았네요


    같은 생각인데


    수정, 삭제 했습니다.

  • @캐스퍼
    그럼 그거대로 또 문제네요

    창씨개명은 김대중,박정희 둘다 했는데

    박정희는 욕먹고 김대중은 욕을 안먹는다?
  • 사관학교에 들어간 그 자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문제가 있지요.
    독립군 토벌 건은 저도 왜곡되었다고 알고 있긴 합니다.

    (출처가 '~에게 들었다.'라는 증언이더군요.
    이런 종류의 증언은 아무래도 직접 봤다는 증언보다는 설득력이 떨어져요.
    그런데 이 말은 어느 진영을 가리지 않고 다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 분들이 이해하실지는 모르겠지만.)
  • 네 잘못알고 계심. 다카키마사오는 박정희를 그대로 훈독으로 읽은거에 불과. 그래서 조선냄새 안나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다시 개명했지. 독립군 토벌 여부를 떠나 문제는 자기출세를 위해 혈서까지 써가면서 굳이 선생때려치우고 만주군육사에 들어갔다는거 아님?
  • @Labddory

    오카모토 미노루요?

    어디서 주워들으신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찾아보고 오시길 바랍니다 허위사실입니다


    혈서건도 날짜가 맞지않아 조작이라는 말이 있구요

  • @강건마
    하나 지적하자면 '허위사실'로도 단정할 수 없고 '100% 사실'로도 단정할 수 없는 상태라고 봅니다.
    결정적 증거자료가 나오지는 않았는데 정작 그 혈서와 관련된 기사는 있다고도 하고.
  • @Labddory
    오카모토 미노루 개명은 한 적이 없음

    잘못 알고 계신 듯 하네요
  • @Labddory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은 박정희가 대구사범 다닐 때 있던 교감 이름이라고 합니다

    전혀 다른인물

    이름 표기도 틀렸다는 이야기가 있네요
  • 당연한 일이죠. 일본군에서 핵심축인 관동군에 들어갔는데 일본이름으로 안바꾸는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문제는 관동군에 들어간 게 곤란한 점이죠. 사실 일본의 아시아 정벌의 첨병이 관동군이니...

    정치색이 보수건 진보건 쉴드칠건 치더라도 깔건 까고 가는게 맞다봅니다. 전 보수고 새누리당 당비도 꼬박꼬박 내는 핵심당원입니다만...뭐 깔건 까야죠.
  • 다카키마사오는 자기 그 이름으로 만주군 장교를 거쳐 한국군 장교로 편입됐지 도요타 다이쥬는 그 이름으로 도대체 뭘했는데? 민족을 팔아먹었나? 만주군육사에 진출했나? 왜 동일선상에서 까여야하지?
  • @Labddory
    그 이름으로 신사참배 했네요
  • @강건마
    신사참배는 그 당시에 일본 지주마저도 한국인 소작농에게 강제로 시키는 일이었죠.보편적인 일이었음... 뭐 창씨개명에 적극적으로 반항 안한 김대중을 까야되는건 별론으로 하고.
  • @무한밥학
    무슨소리하시는거죠?

    1989년 신사참배 말하는건데요
  • @강건마
    1989년에 도요다 다이쥬로 신사참배한건가요? 그건 천황조문 의혹이잖아요. 뭔가 헷갈리셨나봅니다만?
  • 2012.12.5 00:27

    친일인명사전 박정희 편 내용입니다.

    --

    박정희 朴正熙│高木正雄, 1917~1979
    만주국군 중위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이다. 1926년 4월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3월 졸업했다. 1932년 4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3월 심상과(尋常科)를 제4기생으로 졸업했다.

    1937년 4월 경상북도 문경면의 문경공립보통학교(1938년 문경서부심상소학교로 개칭) 훈도로 부임해 1940년 2월까지 근무했다.

    훈도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일차 탈락하고 재차 응모하였는데, 당시의 정황이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신문인 「만주신문(滿洲新聞)」 1939년 3월 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되었다.

    기사 전문에는 “29일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 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를 봉입(封入)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두렵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
    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
    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군관학교 지원의 동기와 좌절된 사연을 미담으로 소개했다.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기혼자인 데다가 연령 초과로 입학 자격이 문제되었으나 다시 도전하여 결국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시(牡丹江市)에 소재한 제6군관구 사령부에서 4년제 만주국 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제2기생 선발 입학시험을 치르고 1940년 1월에 15등으로 합격했다. 만계(滿系 : 日系 외 통합분류) 합격자 240명 중 조선인은 11명이었다.


    자격 제한의 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사자의 강고한 지원 의지와 함께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 교련배속장교로 있다가 전임하여 신징(新京) 교외 제3독립수비대 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 : 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의 추천, 그리고 대구 출신으로 신경군관학교 교관부에 일시 근무하고 있던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인 강재호 소위(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 세칭 봉천군관학교 4기)의 도움이 있었다.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교해 제3련(連) 제3구대(區隊)에 소속되어 군사교육을 받고 1942년 3월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일계 2명, 만계 2명과 함께 우등생으로 선정되어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가 하사하는 금장 시계를 은사상(恩賜賞)으로 받았다.

    예과 졸업 후 타호산(打虎山)에 있는 제6군관구 예하 제5단(第五團) 제3영(營) 제8련(連)에 파견되어 2개월간 조장(組長)으로 부대실습을 한 후 다시 관동군 보병 제30연대 일명 다카다(高田)부대에 파견되어 3개월간 실습을 마쳤다.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다.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한 뒤 견습사관으로서 소만(蘇滿)국경 지대의 관동군 23사단 72연대[치치하얼(齊齊哈爾)에 주둔한 관동군 635부대라고도 한다]에 배속돼 2개월여 근무한 후 같은 해 7월 만주국군 제6군관구 소속 보병 제8단으로 옮겨 배장(排長 :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까지 제8단의 2개 대대가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예과 생도 졸업식의 은사상품 전달식 광경, 「만주일일신문」 1942년 3월 24일 1944년 12월 23일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보병 8단으로 부임해 단장의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乙種)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지는 기수로 근무했다. 옌지(延吉)에서 조직된 8단은 간도지구경비사령부 히노 다케오(日野武雄) 소장이 편성한 히노지대(日野支隊)를 기반으로 출발하였으며, 처음에는 주로 동북항일연군과 소련에 대한 작전을 수행했다. 1938년 7월 말부터 두만강 유역 하산호(湖) 일대에서 벌어진 국경분쟁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 패퇴하는 장고봉(張鼓峰)사건이 발생한 이후, 만주국 국경경비대를 해산하고 국경경찰대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만주국군 잔류를 원하는 군인들을 기간으로 히노지대를 신설했다. 히노지대는 장비와 전투력이 우수하고 대원들의 일제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아 8단의 주력으로 재편되었다. 1943년 8단은 중국 관내의 팔로군을 공격하기 위해 러허성(熱河省) 칭룽현(靑龍縣)과 싱룽현(興隆縣) 일대로 이동해 쭌화(遵化) 인근의 팔로군 11·12단(團)에 대한 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했다. 1944년 4, 5월경 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8단은 칭룽현 서남부의 반벽산(半璧山)을 중심으로 남북 지역에 산재한 팔로군과 교전했으며, 이때 을종 부관으로 8단 예하 각 부대에 작전 지침과 명령을 하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8단에 근무하던 조선인 출신 장교로는 배장 방원철(신경군관학교 2기)과 제1영 본부의 이주일(신경군관학교 1기, 일본육사 56기 해당)이 있었으며, 뒤이어 신현준(봉천군관학교 5기)도 간도특설대에서 8단 연장(連長 : 중대장)으로 전입해 왔다.


    1945년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1945년 8월 보병 8단 예하 각 부대는 둬룬(多倫)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8월 10일부터 이동을 개시해 8월 17일 싱룽에 집결했다. 이곳에서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8단의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신현준 등과 함께 직위에서 해임되고 무장을 해제당했다. 같은 해 9월 팔로군의 지휘를 받는 제8단과 함께 미윈(密雲)으로 이동한 후 이곳에서 8단을 떠나 신현준·이주일 등과 함께 베이핑(北平 : 베이징)으로 가서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 주(駐)평진(平津)대대의 제2중대장을 맡았다. 1946년 4월 평진대대가 해산한 후 5월초 톈진(天津) 탕구(塘沽)항에서 미국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朝鮮警備士官學校 :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3개월의 단기과정을 마치고 12월 14일 제2기로 졸업하면서 조선국방경비대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경비사관학교 생도로 재학할 당시 형 박상희가 대구10월사건으로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을 전후해 남로당의 군 내부 조직원으로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1947년 4월 조선국방경비대 제8연대(연대장 : 원용덕) 제4소대장으로서 38도선 경비를 맡았고, 9월 대위로 진급했다.

     

    1947년 10월 육군사관학교 중대장으로 부임해 8월 소령으로 진급했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동하기로 되어 있던 여수와 순천의 제14연대가 이를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발탁되어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호남지구 전투사령부에서 작전참모로 근무했다. 같은 해 11월 11일 군내 남로당 프락치를 적발하는 ‘숙군(肅軍)사업’을 담당하던 제1연대 정보주임장교이자 육군 정보국 요원인 김창룡 대위(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에 의해 남로당 군 내부 프락치 혐의로 체포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좌익 혐의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군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제공하고 ‘숙군사업’에 적극 협력한 점을 인정받아, 19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면하고 ‘파면·무기징역·전(全) 급료 몰수’ 선고를 받았다.

     

    이후 재심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받았다. 육군본부 정보국의 숙군책임자인 백선엽 육군본부 정보국장(봉천군관학교 9기 출신), 김안일 육군본부 정보국 제3과장(SIS), 김창룡 1연대 정보주임 등이 연대 신원보증을 하고 원용덕(만주국군 군의 중교 출신) 등 만주국군 출신은 물론 일본 육사 인맥들이 적극 구명운동을 해 사형을 면했다. 재판 중에도 육군본부 정보국 1과(전투정보과)에서 근무하다 1949년 4월 18일 형집행정지와 함께 군에서 파면되었다.

    일본 육사생도 시절(앞줄 오른쪽 첫 번째가 박정희 생도)

    육군본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7월 소령으로 육군본부 작전정보국(국장 : 장도영) 제1과장을 맡으면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이후 제9사단 참모장, 육군정보학교 교장,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차장, 제2군단과 제3군단 포병단장을 역임했다. 1953년 11월 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다음해 도미하여 6개월간 오클라호마주 포트실육군포병학교에서 고등군사훈련과정을 이수했다. 1954년 6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제2군단 포병사령관, 육군포병학교 교장 겸 포병감을 지냈다.


    1955년 7월 제5사단장이 되어 1956년 7월까지 처음으로 일선 전투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57년 3월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곧바로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전보 되었다가 9월에 제7사단장으로 임명되어 1958년 6월까지 복무했다. 1958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6월 제1군 참모장으로 보임되었으며, 1959년 2월부터 11월까지 제6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0년 1월부터 7월까지 부산의 육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임했다. 4·19혁명 후 민주당이 집권한 제2공화국 정부 아래서 1960년 7월 제1군관구 사령관에, 9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에 임명되었다가 12월 제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1961년 5월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이 되었고 계엄부사령관·계엄사무소장·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거쳐 7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1961년 8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3개월 후인 11월 육군대장이 되었다.


    1962년 3월부터 육군 대장으로서 대통령 권한대행과 내각 수반을 겸하다가 1963년 8월 정계에 진출하기위해 예편했다. 1963년 9월 민주공화당 총재를 맡았고, 1963년 10월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에 신승(辛勝)해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장기집권을 위해 1969년 9월 3선 개헌을 단행하고 1971년 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2년 10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유신헌법을 공포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꾸면서 유신체제를 구축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제8대와 제9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당시 5·16군사 쿠데타는 불법이라고 공식 규정되었다.



    [참고문헌]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 「(滿洲國)政府公報」 1940.1.6 ; 「滿洲新聞」 1939.3.31 ; 「滿鮮日報」 1942.3.24 ; 「滿

    洲日日新聞」 1942.3.24 ; 「每日新報」 1944.4.22 ; 「朝鮮日報」 1949.2.17 ; 「京鄕新聞」1949.2.17 ; 「서울신문」 1949.2.18

    ; 「東亞日報」(호외) 1963.10.13 ; 「평화일보」1948.11.10 ; 「滿洲國軍誌」(1987) ; 「韓國戰秘史」(兵學社, 1977) ; 「悲劇

    의 軍人들」(1982) ; 「陸士卒業生」(중앙일보사, 1984) ; 黃世霖, 「憂患中的往事」, 「皚皚長白-僞滿軍校學生回顧錄」(吉

    林省靑年運動工作委員會, 2000) ; 「韓國出身日本陸士·滿洲軍校同窓生名簿」(1975) ; 「僞滿軍事」(吉林人民出版社, 19

    93) ; 申鉉俊, 「老海兵의 回顧錄」(1989) ; 「現代韓國人名辭典(合同年鑑67年版)」(1967.1) ; 「실록 군인 박정희」(2004)

    ; 「한일관계의 미래-CIA 보고서」 1966.3.18


    친일인명사전 제2권 106쪽~109쪽에 실린 박정희 항목입니다.

  • 2012.12.5 01:00
    친일아닙니다. 노무현 직속 과거사 연구에 있어서도 친일아니라고 밝혔습니다.
  • @광해
    2012.12.5 01:02
    '노무현 직속 과거사 연구'는 뭡니까? -_-;;
  • @밤별
    2012.12.5 01:05
    흠 이름이 기억안나는데 노무현 시절 과거사 청산에 있어서 연구했던 곳이였는데 (정부단체)
    거기서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 @광해
    2012.12.5 01:10
    아래 글에 같은 이야기를 하시길래 썼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 등재되어 있습니다.
    제가 저 위에 긁어온 글이 그겁니다.
  • @밤별
    2012.12.5 01:14
    아. 맞네요. 민족연구소. 제가 잘못 본거 같네요. 노무현 어쩌고 이름이 다른게 있었는데 결국 같은 거였네요.
    흠. 민족문제연구소라면 그럼 여기 의혹에 대해선 들어보셨겠네요.
  • @광해
    2012.12.5 01:27

    연구단체 이름도 모르시면서 의혹이 있다 이야기하시면 안돼죠.

    예전 백분토론에서 친일인명사전 박정희 등재와 관련해서 직접 민족문제연구소소장님이
    나와서 이야기 한 거 찾아보세요. 박정희는 친일인명사전에서 절대로 빠질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30년 이상의 일제 강점기 시기에 과연 이걸 친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범주에 포함될 수가 없다 이겁니다.
    어쩔 수 없는 친일이 아닙니다.

  • @밤별
    2012.12.5 01:36
    그런가요? 제 개인적으론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장교. 창씨개명. 독립군 토벌. 혈서. 이 모든 것의 반박 글이 있던데 그것도 생각해보니, 또 여기 옮기려니 신뢰가 떨어지는 것 같고 다시 그걸 말로 풀려니 너무 귀찮고 피곤하네요.
    다음에 얘기해요.
  • @광해
    2012.12.5 01:41

    저도 봤으나 그 반박은 레퍼런스가 부족합니다. 박정희 혈서는 일본 국회 도서관에 보관된 당시 신문에도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만주군 중위 복무 사실 자체로 일 군국주의에 기여했다 할 수 있지요. 군국주의 국가라 당시 중위는 지금 한국의 중위와는 소위 '급'이 다릅니다. 적어도 도지사 급은 될 겁니다.

    독립군 토벌에 대한 것은, 당시 만주군이 소탕한 팔로군에는 조선 출신 항일독립세력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이야기로 대신하겠습니다.

    저도 내일 발표 때문에 일단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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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 질문 실성이 누군가요?11 열등재 2012.12.04
24099 가벼운글 8일부터 식당ㆍ호프집ㆍ커피숍 금연...위반시 10만원 벌금4 Dovahkiin 2012.12.04
24098 진지한글 오랜만에보는 인디언의 지혜2 Dovahkiin 201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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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6 진지한글 자신이 잘생겼는지 자가 테스트13 Dovahkiin 201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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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4 진지한글 보진않았지만 오늘자 토론요약.12 BrownSugar 2012.12.04
24093 가벼운글 마이러버 5기 일정입니다.31 빗자루 2012.12.04
24092 진지한글 님들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교육훈련 어케생각8 열등재 2012.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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