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는 어릴 때부터 통찰력과 판단력, 방대한 학식과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났다. 하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적 차별과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격 때문에 주류 사회에서 따돌림과 무시를 당했다. 그는 허울만 가득한 조선의 양반`학자`선비`지식인 등 편협하고 답답한 집단을 비웃었지만, 기득권 세력의 벽을 부수지는 못했다.[7]
그는 서자라는 이유로 멸시당했고, 그가 속했던 북학파는 노론 내에서도 비주류로 취급당했다. 그의 화폐유통론과 국가의 무역 장려론은 상거래를 천시 여기돈 조선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불순한 사상 내지는 이문을 남기기 위한 협잡 정도로 취급되었다. 또한 그의 집안이 원래 소북이었다가 박제가의 대에 노론으로 전향한 것을 두고도 문제가 되었다.
심한 천대와 멸시 냉대에 실망했고 그는 뜻을 펴볼 기회를 잃었다. 정조에 의해 발탁되었으나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에 가로 막힌데다 정조의 죽음 이후에는 유배 생활로 생을 마감했다.[7]
그러나 박제가는 사회적 차별에 굴하지 않았다.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일부러 더 멀리하며”(정유각집 ‘소전’편) 차라리 가난하게 살았다.[5] 박제가는 그 단단한 습속의 벽과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직설과 독설로 맞섰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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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놈들 욕하는 거와 별개로
우리 스스로도 식민지가 안 되었다면 500년 동안이나 내려오던
저런 적서차별,상공인 천시, 무반차별등 더러운 악습과 정신이 일거에 철폐되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조선 전기의 사회체제를 바꾼 계기가 되었듯이
식민지와 육이오 동란과 같은 큰 변란이 조선 500년의 악습이 폐기되는 기회로 작용된 것 만큼은 사실이지 않나요?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고 친일파라고 하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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