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올라온 5.18 관련해서 말인데

야릇한 갈참나무2012.08.16 13:01조회 수 998추천 수 1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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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hdzz.egloos.com/2754306


일단 이건 미 국립문서 보관소 기밀문서(이제 공개되었으니까 기밀문서가 아니겠지.) 번역본.

글에 나오는 몇몇 오덕스러운 짤방은 스킵하면 되고...(본인도 저런거 싫어서 저거 나오면 바로 휠을 쭉쭉)


(1)
▒▒▒▒▒▒▒▒▒▒▒▒▒▒▒▒ 전두환은, 정부 조사관들에게 학생과 시민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영상물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다. 이 사진을 구하려는 계획은, 타임지나 뉴스위크지같은 외신 보도가, 저항하는 민간인에 대한 군인들 - 대부분이 특전사 병력 (Special Force)이 잔인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도한 것을 상쇄시키려는 의도이다. 그리고, 그러한 물증은 반정부 활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도 있다. ▒▒▒▒▒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해낸 것이 없다. 광주의 주민들이 정부 대표자에게 협조를 하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2)
친정부적으로 비쳐지거나, 광주 시민에 호의적이지 않게 보이기 위해 편집된 영상물을 구하려는 노력과 관련하여, 전두환은 주일 한국 대사관에 일본 TV에 방영된 영상물 VTR을 보내도록 지시했다. ▒▒▒▒▒▒▒▒. 일본 TV의 보도물은 전두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광주 사태에서 특전사 병력이 과잉대응했다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전두환이 그 영상물의 일부라도 활용하고자 할때는, (그 필름에) 꽤 상당 부분에 손을 대야 할 것이다.

▒▒▒▒▒▒▒▒▒▒▒▒▒▒▒▒▒▒▒▒▒▒▒▒▒▒▒▒▒▒ 광주 사태 발단시, 특전사 병력이 보여준 모습이 적절치 못한 행동이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 (징계?) 조치가 취해질 경우, 군 내부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주요 핵심 집단이 그 잡음의 소지가 될 것인바, 특전사 지휘관들은 군부 내의 첫번째 핵심 집단의 인원들이기 때문이다.) ▒▒▒ 적절한 징계 절차는, 어떠한 형식이 되었든지간에, 장시간에 걸쳐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조금씩 취해질 것이다.

5. ▒▒▒▒▒▒▒▒▒▒▒▒▒▒▒▒
6. ▒▒▒▒▒▒▒▒▒▒▒▒▒▒▒▒
7. ▒▒▒▒▒▒▒▒▒▒▒▒▒▒▒▒ 요약 : 한국 시각 기준 5월 21일 오전을 기해, 한국 육군은 전라도 출신 장교들을 폭동 진압임무를 위해 광주 지역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이 지역 출신 장교들이 더 성공적으로 데모를 진압할 것이며, 지역 유대감과 지역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말투를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명령을 하달한 이유다. 이 명령은 일부의 반발을 샀지만, 큰 저항은 아니였으며, 대부분은 마지못해 명령에 복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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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특전사의 전 병력이 비상상황에 돌입했다. 13여단 (13 BDE)은 5월 6일 서울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11여단 62대대는 5월 7일에 서울로 이동했다. ▒▒▒▒▒ 이 11여단 62대대가 서울로 이동한 마지막 대대급 병력이다. ▒▒▒▒▒원주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11여단 소속의 61대대와 62대대는, 서울 이동 전, 광부들의 소요 사태에 대비해, 대기 상태에 있었다. (※'광부들의 소요 사태'는 사북사태로 추정됨) ▒▒▒▒ 인천에 있는 제 5여단 병력을 수도권 지역 병력으로 감안한다면, 제7여단만이 유일하게 서울 지역에서 떨어져 있는 병력이다. 제7여단 병력은 유사시 전주 및 광주 지역 대학들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11여단은 5월 4일 일요일에 참모-지휘관 모임을 가진 바 있다.▒▒▒▒ 병력의 서울 이동이 가장 중요한 주제다. ▒▒▒▒▒ 11여단 및 13여단 주둔 지역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수 없다. 3개 대대로 구성된 이 11-13여단은, 특전사 내에서 가장 작은 규모이다. 나머지 5개여단은, 각각 4개 대대를 지휘하고 있다.

(2)▒▒▒▒▒▒▒▒▒▒ 전 특전사 부대는 소요 사태 진압을 위한 집중 훈련을 받아왔다. 특히, 최루가스 (CS Gas) 사용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아왔으며, ▒▒▒▒▒ 소요진압을 위한 기타 특수장비로는, 정규전용 방탄모 위에 착용하는 스크린 마스크가 포함되어 있다. ▒▒▒▒▒▒▒▒▒▒

(3) ▒▒▒▒▒▒▒▒▒▒ 제606대대로 추정되는 1개 대대는 특수 훈련을 받았다. 이 부대 소속병력 모두가 머리를 기르고 있으며, 작업복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병력이 학교 구내에서 활용할 병력인지는 확실치 않다.

(4) 많은 사람들이 특전사 병력에게 부과된 국내 치안의 역활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염증을 느끼고 있다. 1979년 부산-마산 소요사태 당시, 파견된 특전사 소속 장교와 사병들은 '머리를 박살낼'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럴 의지도 있었다.

가장 최근 원주에서 대기상태에 있었을 때의 태도에 대한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사북사태에서의) 광부들이 옳다는 의견들을 피력한 바 있다. 광부들의 임금인상 요구는 옳다는 것이였다. 학생 데모진압 활동에 대해서는 이와 다소 다른 견해이긴 하지만, 적극적인 자세는 아니다. 특전사가 학생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할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요구들은, 특전사 내의 기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게 5.18 관련 미국 국립문서 보관소 기밀문서의 내용이라고 함.

완전기밀해제가 아니고 부분기밀해제라서 완전공개는 아니라고 함.


이 글에 대해서 포스팅의 저자는 이렇게 해석을 했는데...


1. 당시 전두환은 자체적으로 땜빵처리를 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뉴스위크지나 타임지같은 외신의 보도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걸 알고, 일본의 한국대사관을 통해서 녹화테이프를 입수하고, 가위질을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여지지만, 이 비디오조차도 써먹으려면, 대패질을 심하게 해야 할 정도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돌려말하고는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지요. 게다가, 전두환이 떳떳하다면, 굳이 필름에 가위질을 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보안사를 통해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던 건 만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2. 군 내부에서도, 폭력진압에 대해서 말이 많았던 듯 하고, 당시 미국 측은 '어떤 형식으로든 처벌을 할 거다'라고 예상했지만, 결국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당연합니다. 12.12 쿠데타 (1979)의 전개 과정에서도 봤듯이, 전두환의 핵심 인사들은 대부분이 특전사 소속이고, 당시 노태우는 수도경비사령관 (현 수도방위사령부)였으니, 군 중추 지휘관들이 자신들을 처벌할 리는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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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서는, '폭동진압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전라도 출신 장교들을 배치했다고 합니다. 일부 반발은 있었지만, 별 탈없이 넘어갔다는 내용도 있고요. (여기서 우리는 국민군 개념이 아닌, 일본군식의 사병화의 패악질을 보고 있습니다.). 북한 특수부대가 잠입해 있다면, 말투가 똑같은 전라도 출신 장교들을 투입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북한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요. 차라리 중정 소속 대공수사반 수사관 양반들에게 총을 쥐어주고 부대에 끼워주는 게 낫지 않겠어요?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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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알려진대로, 당시 병력의 이동은 미국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했습니다. 해병대 1사단의 이동에 대해서는, '승인'이라는 단어를 썼지요. 하지만 특전사 병력은 '통보'만 했습니다. 이유는 별 거 없는데, 당시 수경사가 수도방위라는 특수임무를 띄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이 독립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부대인 것처럼, 당시 특전사도 시위진압이라는 특수임무 때문에 이동승인 요청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전시는커녕 평시작전권도 넘어오지 않은 시점에서) 미국의 관할권이라면, 미 대사관에서 '통보'라는 단어를 쓸 리는 없을 테니까요.

2.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당시 특전사를 비롯한 전군은, 정규훈련을 중지하고, 충정훈련이라는 시위진압 훈련만 반복적으로 시키고 있었습니다. 물론 외출/외박/휴가따위는 없고요. 일부 장교와 사병들은 이에 대해서 반감을 품었던 듯 한데, ('사북사태' 관련 구절 참고), 문자는 이러한 불만은 (전두환과 군부 입장에서) 그리 심각한 사안은 아니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광주에서는 금남로에서 대규모 발포가 있었거든요. 더 문제는, 당시 미국이 '특전사가 발포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기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예견은 했다는 겁니다. 즉, '특정 상황'에 대비해 특전사 내부에 발포 명령이 내려진 가능성도 시사했다는 거지요.

3. 606대대 관련 구절에는, '머리를 길렀지만 작업복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일부(?)'에 대한 논의로 봐서는, 일부 병력을 학생들 사이에 끼워넣어 첩보전을 벌일 목적도 있었던 듯 합니다.

4. 그리고, 글라이스틴이 보낸 전문에서 '5월 10일의 가두시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에 관란 내용인데, 아마도 이 부분은 서울역 회군에 관한 내용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실제 서울역 회군 사건은 5월 15일에 일어났지만요.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음. 나도 공감하는 바이고.


게다가 무엇보다 광주는 북한 입장에서는 당장 특수부대 투입의 매력이 떨어지는게

당시 북한하고 가까운 서울도 '서울의 봄'과 5.17 쿠데타와 같은 사건으로 인해 혼란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자라면 가까운 서울을 노리지 뭐하러 광주로 돌아가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서울에 잠입하는게 쉽겠냐 광주에 잠입하는게 쉽겠냐.)


게다가 해상침투 자체가 북한으로서는 성공확률도 떨어지는데다가 발각 가능성 역시 높은 상황이며

무사히 침투한다고 해도 육지 진입 과정에서 거의 100% 확률로 들켜버리거든.

게다가 특수부대가 꽤 대규모로 움직였다는데 그럴 정도면 이미 광주에 진입하기 전에 무조건 들키지.

울진-삼척, 강릉, 다대포 쪽으로 진입했던 간첩들이 죄다 잡히거나 죽은거 생각해보셈.



김일성-김정일의 말은 출처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는데(원저자는 출처 좀 알려주셈. 알려줘야 믿지 ㅇㅇ?)

일단 그건 출처가 제대로 확인되면 다시 생각해 볼 문제고(김일성 발언에 대해선 다르게 해석은 해봤는데...)


PPSh-41 문제는 정확히 반박할 수 있는 자료를 찾고 있음.

다만 이건 내 생각인데, 6.25 전쟁 과정에서 노획한 북한군 무기를 예비군 무기고에 넣어두지 않았겠나 하고 생각함.

저 소총 하나로 무조건 북한군 소행이다 하고 말할 수 있다면

나도 저건 6.25 전쟁에서 노획했을 가능성 있다 하고 말할 수 있다. ㅇㅇ
이 문제 역시 자세한 자료를 찾고 나면 다시 이야기하겠음.


그리고 당시 예비군 무기고는 지금 생각하는 바와 같이 일급기밀이 아니었다 하더군.

뭐 마을회관과 같은 곳에 예비군 무기고를 놔뒀던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

현재와 같이 예비군 무기고를 은폐한 게 5.18 당시에 무기고가 털려서 그랬다고들 하니까.

(결론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당시를 함부로 평가하면 안된다는거다.

겨우 30년 전이라고 하지만 그동안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냐.)




그 외에도 아직 자료정리 못한게 남아있긴 한데 일단 1차적으로 글 올림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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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회장 구속 (by 화려한 삼나무) 반지원정대 보는데 (by 착잡한 새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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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글쓴이
    2012.8.16 13:12
    아, 그리고 추가적으로 당시 광주 무기탈취를 주도했던 자의 증언자료도 첨부함.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47&sca=&sfl=wr_subject&stx=%B9%AE%C0%E5%BF%EC&sop=and

    여기 가서 확인하면됨.
  • 5.18 터질때 북한에서 간첩들이 잡입해올까? 5.18 터지기 전에 미리 간첩들이 들어와있을까?
    어느게 가능성이 커보이나요?
    간첩이 잠입할 수 없다고 가정하시는데, 그러면 남한 내에서 간첩이나 좌익사범들이 잡히는 건 뭐 갑자기 나타난 겁니까? 설마 언론에 드러난 간첩사건이 간첩들의 100%라고 생각하시는건 아니겠죠?
    김일성 김정일 발언은 북측 군인 출신 탈북자가 탈북 후 기자회견을 가진 겁니다. 저 멘트 복사해서 쳐보면 나옵니다. 뭐 못믿겠다 이러면 저도 할말은 없고요. 그렇게 치면 언론들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거죠.
  • @끔찍한 솜나물
    글쓴이글쓴이
    2012.8.16 13:23
    규모의 문제 ㅇㅇ 밑 글에는 규모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했는데, 다른 곳에서 특수부대 잠입의 규모를 보면 600명 정도가 잠입을 했다카네요? 그런데 그 정도의 규모가 잠입을 하면 100% 확률로 들킴. 아니 이걸 떠나서 따로따로 잠입했다 쳐도, 그렇게 광주까지 내려가는 동안 죄다 발각되었을걸요? 저 인원이 소수로 나눠서라도 잠입이 가능할 정도로 대한민국이 국경경계가 답안나오는 나라도 아니고요.

    그리고 남한 내에서 간첩/좌익사범은 국내의 자발적 동조자들이 더 많은 걸로 아는뎁쇼?(범민련이라거나, 최근의 일심회/왕재산 사건 같은 경우는 일단 국내에서 먼저 북한과 동조한 케이스니까요.)

    추가적으로 김일성/김정일 발언이 탈북 후 기자회견에서 말한 것을 떠나서 저 발언이 북한 언론에 공개되었다거나 하는 그런 자료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안 그래도 일부 극우세력들이 탈북자들을 매수해서 자기 쪽에 유리한 발언을 하게 만든다는 루머도 존재하는 상황에서 저 발언의 진위를 입증할 북한 언론자료라던가(조선중앙방송을 언론이라 말하기는 뭐하다 쳐도 어쨌건 명목상으로는 북한 언론이니까 저런데 나와야할텐데 아직 그런 것에 대해선 들은적이 없는데 말이죠.?)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ㅇㅇ.
  • '게다가 해상침투 자체가 북한으로서는 성공확률도 떨어지는데다가 발각 가능성 역시 높은 상황이며
    무사히 침투한다고 해도 육지 진입 과정에서 거의 100% 확률로 들켜버리거든.
    게다가 특수부대가 꽤 대규모로 움직였다는데 그럴 정도면 이미 광주에 진입하기 전에 무조건 들키지.
    울진-삼척, 강릉, 다대포 쪽으로 진입했던 간첩들이 죄다 잡히거나 죽은거 생각해보셈.'


    그 간첩이 그 간첩이 아닙니다.
    글쓴이 님이 생각하는 간첩은 무장간첩 뿐인 듯 한데요
    논란이 되고 있는 북한의 개입이란 건 민간인임을 가장한 생활 속에 녹아있는 그런 간첩
    간첩 5만 시대라면서 영화도 나오드만..

    '광주에서 민주화운동 일어나려 한다우 뽀트 띄우라우'

    뭐 이런 식으로 간첩 투입시키는 게 아니라..ㅋㅋ
    이미 광주나 전국에 깔려 있죠 간첩이 하...
    분단이래 쭈욱!!! 적국에 첩보활동 안하는 나라가 어딨냐고!!
    월맹 월남 이야기는 아실란가

    뭐.. ex기밀문서 가져오시구 그런 건 대단해 보이시는 데....

    생각은 좀 어리시네요

  • @운좋은 산박하
    글쓴이글쓴이
    2012.8.16 13:33

    밑에 무기 언급까지 되어있으니까요. 위에 저 PPSh-41이 알고보니 제작자의 오류라는 글을 올렸지만, 저 소총을 들고 올 정도면 무장간첩 맞아요. 민간인으로서 가장하는게 불가능함. 게다가 제가 그 간첩들 잠입상황을 몰라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군복무 마친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 그러니까 글 내용대로 저기 올라온 무기사진 가지고 특수부대 잠입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그걸 토대로 무장간첩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민간잠입 간첩이라면 저 무기 가지고 오는게 불가능하지요. 안그래요?


    애초에 무장공비와 민간잠입 간첩의 침투 방식이나 목적, 활동방식이 다르다는 건 감안하셔야지.

    저보고 생각 어리다고만 주절대지 말고 자기 생각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시지 그래요?

    PS : 월맹 월남 이야기는 군복무 때 정신교육 시간에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이골이 날 정도임.
    그렇다고 해서 저 이야기에 교훈이 있는 걸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요.

  • 100% 확률로 들켰다고는 하는데 우리가 발견한 것만 다 처리했다고 해서 그게 100% 일까요? 지금 현대 기술로도 천안함 피격을 당했는데
  • @기발한 노랑꽃창포
    글쓴이글쓴이
    2012.8.16 13:30
    천안함은 제 친구에게 들었던 말인데(얘는 공군부사관이지만 부친이 해군출신) 서해라는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하더군요. 자세한 거 듣기는 들었는데 몇 년 전이라 기억이 잘 안나서... ㅠㅠ 아무튼 서해의 특성상 북한 도발이 확실하고 그걸 추적하기도 힘들었을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었습니다.
  • 1.총상 사망자의 69%를 순수한 광주사람들이 쏘았다면 그 희생은 광주의 자작극
    수사기록을 보면 광주에서 사망한 민간인 수는 166명, 그 중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이 116명이다. 이 116명 중 69%에 해당하는 80명의 총상사망자가 무기고

    에서 탈취한 총들에 의해 사망했고 계엄군이 소지했던 M16소총에 의해 사망한 민간인은 불과 36명뿐이었다. 이 69%라는 수치는 오발이나 실수로 불 수 있는 수

    치가 아니라 5.18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수치이며, 이는 광주에서 사망한 총상 사망자의 대부분을 광주시위대가 쏘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놓고 냉철한 과학적 시각으로 본다면 5.18에서의 민간사살은 광주시민들이 광주시민들을 쏘아죽인 자작극이라는 엄청난 결론이 유도되는 것이다. 광주사위대가

    이렇게 많은 광주시민을 조직적으로 쏘았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왜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을 쏘았을까? 필자는 광주사람이 광주사람을 그렇

    게 조직적으로 쏘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광주시민들도 필자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만일 필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5.18은 자작극이 되

    는 것이다. 그러면 수만 단위, 수십만 단위로 몰려다니던 광주시위대들은 순전히 광주시민들로만 구성이 돼 있었을까? "모든 시위대들에는 절대로 불순분자가 끼

    어들 수 없었고, 모든 시위대가 순수한 광주시민들로만 구성돼 있었다" 이렇게 주장해도 광주의 희생은 자작극이 되는 것이다.


    2.'자작극'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려면 광주가 69%의 소행이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내야
    광주의 희생은 절대로 자작극이 아니며, 명예를 중시하는 광주시민들은 결코 이런 천인공노할 자작극을 저지를 사람들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이

    69%의 소행이 순수한 광주사람들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광주시민들이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 69%는 광주사람들이 저지른 행위가 아니다” 이런 주장 하나만에 매달린다고 해서 자작극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어느 이방인들이 수만 수십만

    단위의 시위대에 끼어들었는지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자작극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69%의 소행이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필자의 이런 노력에 박수를 쳐주고 격려해야 할 5.18단체들은 거꾸로 필자를 박해하고 있다.

    참으로 답답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5.18단체들의 행위들은 필자를 박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들에 '자작극'의 멍예를 영원히 씌우고 있

    는 것이다. 광주시민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5.18단체들이야 말로 광주시민들의 적인 것이다.




    3.무기고 위치 사전파악의 의미

    38개 무기고 위치를 사전에 파악한 존재가 광주 시민이었다면 5.18은 더 이상 민중항쟁이 아니라 광주사람들에 의해 사전에 계획된 국가반역사건이 되는 것이

    고, 그 존재가 북한특수군이었다면 5.18은 북한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1995년 7월 18일 검찰이 내놓은 ‘5.18관련사건수사결과’보고서를 보면 1980년 5월 21

    일, 12시부터 16시까지 4시간대에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있는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 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동시다

    발적으로 탈취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증9, 100, 101쪽) 같은 검찰 기록을 보면 시위대가 어떻게 알았는지 극비의 군사기밀사항을 알아냈다. 20사단 지휘부가

    광주 톨게이트를 5월 21일 오전 8시 경에 통과할 것이라는 극비사항을 알아낸 것이다. 군의 이동계획은 극비 중의 극비사항이다. 이런 극비사항을 알아냈다는 것

    은 군에 간첩이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정보를 입수한 300명의 시위대는 광주 톨게이트 부근에서 화염병 등을 가지고 매복해 있다가 08시에 그 지역을 통과하던

    20사단 지휘부로부터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했다. 사단장용 1호차도 빼앗긴 것이다. 감히 사단지휘부를 공격하여 이러한 전과를 올린 것은 시민들의 단순한 시위

    가 아니라 군사작전이었다. 이들 300명은 14대의 지휘차량 등을 타고 방위산업업체인 아시아자동차로 갔다. 도착시각이 아침 9시였다. 이 300명과는 별도로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오전 9시 경에 역시 아시아자동차에 합류했다. 이들은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를 탈취했다. 이

    차량들은 누군가에 의해 17개 시군에 널려있는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 뇌관저장소, 도화선 저장소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할당되었고, 이들 38개 조는 할

    당받은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들을 향해 마치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곧장 달려가 2개 연대 무장에 필요한 양의 무기를 탈취했고 여기에 더해 8톤 트럭

    한 대 분의 다이너마이트와 이를 무기화한 뇌관도 도화선을 탈취했다. 가장 먼저 털린 시각은 낮 12, 가장 늦게 털린 시각이 오후 4시였다.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

    서 가까이 있는 무기고는 이른 시각에 털리고 가장 멀리에 있는 무기고는 늦은 시각에 털린 것이다. 이는 군사작전이지 시민들의 시위가 아니었다. 특히 화순광업

    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한 후,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한 자들은 복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자들이었다. 폭약과 뇌관과 도화선을 동시에 탈취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탈취물들을 가지고 무기를 조립할 줄 아는 특수전문가들이라는 것을 의

    미한다. 육사를 나온 필자도 공병훈련을 어느 정도 받긴 했지만 대령으로 예편을 할 때까지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무기를 만드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당시 동아

    일보 김영택 기자는 이들 300명으로 이루어진 두 그룹이 연고대생이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청문회에서 증언했지만 이들 연고대생 600명은 그 후 보상금을 받은

    바 없다. 그들이 남한 사람들이었다면 주민등록증을 제시하여 많은 보상금을 받았을 것이다.(첨부9,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 91-108쪽) 38개라는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얼마나 오랜 동안에 걸쳐 찾아낼 수 있을까? 숫자로는 제시할 수 없겠지만 상당한 재능이 있는 여러 사람들이

    동원되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헤매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하나의 무기고 위치를 알아내려면 여러 날에 걸쳐 예리한 코를 가지고 냄새를 맡은 후,

    그 곳을 여러 날에 걸쳐 관찰해야 겨우 하나의 무기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38개 무기고의 위치를 알아내는 일은 광주

    시민들이 5월 18일 이후 불과 3일 만인 5월 21일 아침 9시까지 해낼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도 황석영과 북한당국이 쓴 5.18 역사책들을 보면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에서 시민들이 계엄군으로부터 무차별 사격을 당한 후 “총, 총, 우리도 총이 있어야 해”하고 무기고들을 털기 시작했다고 쓰여 있다. 마치 무

    기고 위치들이 누구의 눈에나 다 뜨이는 공개된 시설인 것처럼 묘사돼 있다. 5.18사람들은 5.18시위가 5월 18일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을 빨갱X로 간주하고 사냥

    을 하듯이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때리고 찌르고 하는데서 격분해 일어난 우발적인 저항이었지 결코 사전에 기획된 시위가 아니었다고 강변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동안에 찾아낼 수 있는 무기고 위치를 순수한 광주시민들이 조사해 낸 것이라면 5.18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획돼온 반란사건이 되는 것이다.






    4. 5.18무기고 위치 사전파악 사실의 재음미
    1980년 5월 21일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4시간 동안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 위장돼 있는 38개 무기고가 털렸다. 38개 팀이 각 무기고로 가는 약도 한 장

    씩을 가지고 동시에 출발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반 국민은 무기고 옆을 지나면서도 그게 무기고인지를 알지 못한다. 무기고 위치는 비밀로 관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38개라는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얼마나 오랜 동안에 걸쳐 찾아낼 수 있을까? 숫자로는 제시할 수 없겠지

    만 상당한 재능이 있는 여러 사람들이 동원되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헤매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사람들에게 ‘무기고 어디 있는지 아느냐?’ 하고 물어보

    며 다닐 수도 없는 성격의 일을 성사시키려면 상당한 재간과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이 하나의 무기고 위치를 알아내려면 여러 날에 걸쳐 예리한 코를 가

    지고 냄새를 맡은 후, 그 곳을 여러 날에 걸쳐 관찰해야 겨우 하나의 무기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광주 시민들이 5월 18

    일 이후 불과 3일 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니다. 더구나 황석영과 북한당국이 쓴 5.18 역사책들을 보면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에서 시민들이 계엄군으

    로부터 무차별 사격을 당한 후 “총 총 우리도 총이 있어야 해”하고 무기고들을 털기 시작했다고 쓰여 있다. 마치 무기고 위치들이 누구의 눈에나 다 뜨이는 현저

    한 지형지물인 것처럼 묘사돼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기고 위치는 비밀로 관리되며 철저하게 위장돼 있다.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서 위장돼 있는 38개 무기고 위

    치를 찾아내려면 수많은 고정 간첩들이 동원되어 오랜 기간에 걸쳐 은밀히 지구력 있게 탐색활동을 해야 한다. 절대로 광주시민들이 즉흥적으로 며칠에 걸쳐 찾

    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찾아내기 힘든 38개 무기고 위치를 5월 21일 이전에 찾아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5.18 이전 몇 개월에 걸쳐 전라남

    도 17개 군에 수많은 간첩들이 깔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광주사태가 즉흥적으로 발생된 것이 아니라 북한의 사전 계획 하에 준비되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

    는 것이다. 1995년 7월 18일 검찰이 내놓은 ‘5.18관련사건수사결과’보고서를 보면 1980년 5월 21일, 12시부터 16시까지 4시간대에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있

    는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탈취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증9,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1995.7.18. 100, 101쪽) 같은 검찰 기록을 보면 시위대가 어떻게 알았는지 극비의 군사기밀사항을 알아냈다. 20사단 지휘부가 광주 톨게이트를 5월

    21일 오전 8시 경에 통과할 것이라는 극비사항을 알아낸 것이다. 군에 간첩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300명의 시위대가 광주 톨게이트 부근에

    서 화염병 등을 가지고 매복해 있다가 08시에 그 지역을 통과하던 20사단 지휘부로부터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했다. 이는 시민들의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군사작

    전이었으며 이들은 빼앗은 14대의 지휘차량 등을 타고 방위산업업체인 아시아자동차로 갔다. 도착시각이 아침 9시였다. 이 300명과는 별도로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오전 9시 경에 역시 아시아자동차에 합류했다. 이들은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를 탈취했다. 이 차량들은 누

    군가에 의해 17개 시군에 걸쳐 있는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 뇌관저장소, 도화선 저장소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할당되었고, 낮 12시부터 오후 4시에 이르

    는 동안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들을 향해 마치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곧장 달려가 2개 연대 무장에 필요한 양의 무기를 탈취했고 8톤 트럭 한

    대 분의 다이너마이트와 이를 무기화한 뇌관도 도화선을 탈취했다. 이는 군사작전이지 시민들의 시위가 아니었다. 시민들은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살아간

    다. 시민들이라면 잘해야 한 두 개의 무기고 위치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도에 좌표를 찍어가지고 이러 저리 방황할 시간조차 없이 4시간대에 쏜살

    같이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의 무기고로 달려간다는 것은 간첩으로 이루어진 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특히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한 후,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한 자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자

    들이었다.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는 이들 300명으로 이루어진 두 그룹이 연고대생이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청문회에서 증언했지만 이들 연고대생 600명은 그 후

    보상금을 받은 바 없다.(첨부9,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 91-108쪽) 이에 대해 북한 당국이 발행한 5.18 역사책을 보자. 북한 조선노동당 출판사가 1985년에

    발행한 5.18역사책 ‘광주의 분노’에는 이런 표현들이 있다.(증38, 34-35쪽) “5월 21일, 광주고등학교와 숭일고등학교 학생들이 ‘학도호국단’의 무기고를 들이치

    고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것은 광주 인민봉기과정에 봉기군이 처음으로 벌린 무기탈취투쟁이었다. . . .이 때부터 봉기군들은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놈들의

    무기고를 본격적으로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폭동군중들은 괴뢰들의 군용차량 공장인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

    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들은 이 로획한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

    관들을 빼앗아 내었다. . . 이리하여 무기탈취 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 4시 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빈총 2,240정, 엠-1 보총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만 6,400여발이었고 장갑차 4대, 군용차량이 400여대에 달하였으며 수백 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개의 뢰관들도 획득하였다. . . 괴뢰군

    제 179지원단의 무기고를 습격할 때의 일이었다. 폭동군중이 무기고를 향해 밀려들자 보초놈들은 사격을 가하면 완강히 저항하여 나섰다. . .정면으로 밀고 들어

    가면 막대한 희생을 낼 수 있다고 본 군중들은 정면에서 사격전을 벌리는 한편 몸이 빠른 청년들로 놈들의 배후를 기습하게 하였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돌격대’

    ‘특공대’를 두었고 대학생들은 ‘전남지역학생총련맹’의 지휘에 따라 대학별로 전투대오를 조직하였다, . .”(증38, 37-38쪽) 광주의 분노'(증38)의 36쪽에는 시민

    군이 탈취한 무기고의 이름들이 나열돼 있다. 안기부 자료 및 검찰보고서와 비교를 해보니 북한자료가 훨씬 더 자세했다. 예를 들어 안기부 자료(증8 57쪽) 및 검

    찰자료(증9 101쪽)에는 “화순군의 동면지소 등 4개지서의 무기고를 털었다”고 되어 있다. 북한자료에는 '전투경찰중대무기고' '동면지서' '통주지서' ‘향토예비군

    무기고'로 특정하고 있다. 라주군의 5개 경찰서에 대한 기록도 북한자료 증 38(36쪽 상단 3개줄)이 훨씬 더 상세하다. 북한 노동당 출판사가 1985년에 남한의 상

    활일지보다 더 자세한 상황자료를 정리했다면, 북한사람들이 5.18광주에 와서 계엄군 또는 경찰보다 더 자세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38개 무

    기고 위치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북한 간첩들이요, 무기고 이름을 남한 자료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할 수 있는 존재도 북한 간첩들이요, 무기를 터는 상

    황을 동영상처럼 기록할 수 있는 것도 북한 간첩들이다. 우리 군이나 경찰의 상황일지에는 동영상처럼 행동을 묘사한 자료가 일체 없다. 이를 모두 종합해 보면

    5.18광주에 북한 사람들이 확실하게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무기고 위치를 누가 사전에 알아낸 존재는 오직 북한 고종 간첩들 밖에는 없고, 5,18광주상황

    을 현장에서 관찰하고 이를 동영상처럼 묘사한 집단이라면 이는 오직 북한집단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는 확실한 결론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탈북자

    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증언하는가를 알아보자. 탈북군인들로 구성된 ‘자유북한군인연합’이 발간한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는 전직 북한 여교사의 증언이

    있다. 이 여인은 5.18 광주에 왔다가 “5.18공화국영웅” 이라는 칭호를 받은 안창식과 2명의 아이를 낳은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이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증언한

    다면서 이런 증언을 했다. “목포에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

    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

    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증언록 78쪽) 또 다른 탈북자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직접 광주에

    갔다왔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 남한 봉기자들이 무기고를 털어서 총(무기)을 주어도 잘 받지 않았다고 했다.”(증언록 34쪽) 또 다른 증

    언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남조선에 숨어있는 지하조직들과 협동해서 무기고를 탈취하고, 또 사람들을 죽이면서 광주인민들을 자극했다고 하였다. 강원도 어느

    탄광인지, 그곳에서 일어났던 봉기에도 참가했다고 하였다.”(증언록 37쪽) 또 다른 탈북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 광주에서 대학생들의 소요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우리 쪽에서 남조선에 나가서 활동하는 특수부대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남조선에 침투하여 단기 소부대작전을 하던 사람들은 게릴라전의 전문

    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광주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남조선시민들이 아니라 다 우리가 한 일이었다.”(증언록 209쪽 11-16줄) 또 다른

    탈북자의 증언이다.“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눠주는 장소에서 광주시민 한 사람한테 정체가 노출될 번한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여성(대학생정도로 생각했다고 하였음)에게 무기를 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

    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증언록 347쪽) 무기고를 탈취의 지휘는 누가 했는가? 탈북자들은 한결같이 북한 특수군이 내려와 지휘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이

    에 대한 자료는 수사기록에도 없고, 북한 자료에도 없다. 단지 냄새만 날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고를 위치를 누가 알아냈는가?’에 대한

    것이다. 탈북자들은 북한특수군의 지휘로 고정간첩들이 총동원되어 3개월 전남지역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다고 증언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논리적 판단과 정

    확히 일치한다. 우리 검찰 수사자료에는 분명히 5월 21일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17개 시군에 숨어있는 38개 무기고를 모두 털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사

    전에 무기고 위치를 정확히 알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이고, 위치들을 정확히 알아내려면 수많은 고도의 기술자들이 수개월에 걸쳐 온 지역을 이 잡듯이 뒤져야 찾

    아야만 찾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광주사태는 북한이 기획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 @끔찍한 솜나물
    글쓴이글쓴이
    2012.8.16 13:39

    무기고 이야기야 글에 언급했으니까 딱히 언급할 필요도 없겠네요. 이미 말했다시피 오늘날의 기준으로 옛 시대를 재단하려면 반드시 오류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당장 10년 전의 생활상이라고 해도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기준으로 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당장 무기고 보안은 저 5.18 당시 탈취사건을 계기로 강화되었다고 하고, 그 이전에는 민간인들마저도 쉽게 알 수 있는 지역에 예비군 무기고가 있었다고도 하니.

    그리고 1, 2번 자료는 통계자료를 다시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듯 합니다. 5.18 사상자 관련 통계자료가 발표측마다 꽤 차이가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저도 다시 확인해보고 알아봐야겠네요 ㅇㅇ.


    PS : 무기고 관련한 글 보니까 다시 생각났는데, 이 글의 맨 첫번째로 올린 댓글은 보고 말씀하시는지? 무기고 탈취 지휘자의 증언이 있는데?

  • @글쓴이
    글쓴이 님도 탈북자 증언을 안믿으면서 제가 저 증언을 어떻게 믿습니까?
  • 그냥 이건 제생각인데... 위에 댓글다신 분 말씀대로 5.18이전에 무기가 이미 탈취되었었다면 분명 간첩의 소행이 맞겠죠..?? 그리고 글쓴이님 제시하신 자료처럼 5.18이후에 무기탈취가 이어졌다면 시민차원의 자위권발동을 통한 정당한 저항이었다고 생각되네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둘다 거짓말 같이는 않은데,,, 둘다 맞다면, 간첩을 소탕하는 작전중 극단적인 군인들이 시민을 과도하게 탄압하면서 커지면서 벌어진 일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마치, 같은 편 둘 사이에 끼어서 이간질하는 어떤사람이 생각나네요, 결국 재미는 그사람이 보는거죠 우리끼리 죽어라 싸우고...뭐 어떻게 보면 정말 간첩이라는 직업에 가장 잘맞는 작전처럼 보이네요..

    그냥 저냥 이런생각이 저위에 분이 댓글로든 자료는 저도 처음 보는 내용이라...신뢰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맞다고 한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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