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대나무숲
#24138번째포효
오늘 새벽, 사랑했던 너에게서 문자가 왔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난 더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서 그대로 산산조각나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꼬박 일 년 만에 핸드폰 액정에 비친 네 이름 세 글자는 아직도 내 심장을 터질듯이 빨리 뛰게 했다.
너와 나는 수 년간 서로의 제일 친한 친구였고 그 중에서도 일년 가까이를 연인으로 지냈다. 주위 사람이 마음고생 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지 못하는 성격 탓에 별 생각없이 건넸던 내 작은 손길에도 자기는 내가 아니었으면 혼자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낼 수 없었을 거라며 고마워하던 마음이 예뻤고, 언젠가 기댈 곳이 없어 힘들어했던 나를 감싸 안아주던 듬직함이 참 고마웠다. 오지랖 넓은 것도, 사람 좋아하고 외로움 타는 성격도, 좋아하는 음료부터 취미까지 우리는 서로 너무 닮아 있었고 그런 너에게 더 친밀감을 느꼈다. 유학생이었던 나 때문에 너는 잠도 못 자고 새벽에 내게 전화를 걸었고, 여름이 되어 아주 잠깐 동안만 한국에 들어왔을 때에도 입시학원을 다니느라 시간이 없었던 나를 위해 네 스케쥴도 과감히 포기한 채 내가 있는 곳으로 어디든 언제든 달려오곤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에게 왠지 모를 호감을 내비치는 너를.
아니겠지, 아닐거야. 정이 많은 네가 친한 친구인 나를 그만큼 편하게 대하는 것 뿐인데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네가 부담스러워 너를 밀어내려 할수록 너는 내가 열심히 쌓아둔 방파제를 아득히 넘는 파도가 되어 내 마음에 밀려왔다. 우리가 처음 친구가 되었을 땐 내가 너의 버팀목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네가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우리는 고3이 되었고, 밤공기가 시원했던 여름방학의 어느날 밤 어두운 운동장 스탠드에서 너는 내게 고백했다. 나는 아직도 그 밤의 네 떨리는 눈빛을, 촉촉한 음성을, 너와 처음 나눴던 수줍은 키스를 잊지 못한다. 내가 너를 만난 지 4년이 좀 넘었을 즈음, 우리는 그렇게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다.
나는 너를 내 마음 다 바쳐 사랑했다. 장거리 연애를 힘들어하는 너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 전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아시아 대학 여러 곳에 원서를 넣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여태까지 서로에게 든든한 서포터가 되어왔고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해 왔으니까, 남은 유학생활 1년 정도는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잠시, 여름이 끝나고 우리 사이는 급격히 틀어지기 시작했다. 일만 킬로미터가 넘는 둘 사이의 거리, 12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시차, 두 고3의 너무도 다른 하루 일과와 수험 스트레스. 친구였던 시절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들이 어느 새 큰 벽이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았지만, 수능이 끝나면 나아질 거라 믿었다. 나는 겨울방학에 다시 한국에 가서 너를 볼 생각 하나로 매일을 버텼다.
내가 그 해 겨울에 한국에 돌아갔을 때 너는 이미 어딘가 변해 있었다. 쌀쌀해진 공기처럼 네 마음도 차갑게 식어버린 것만 같았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말처럼, 너는 내 출국을 2주 정도 남겨둔 어느 날 새벽에 내게 네 진심을 털어놓았다. 내가 보고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도 힘들고, 내가 힘들어할 때 그런 나에게 자기가 당장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게 제일 힘들다며, 사실은 내게 헤어지자 말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너무도 이기적인 네 말에 화가 났지만 너를 절대 잃을 수 없다는 생각이 더 컸기에 어떻게든 널 설득하려 했다. 자신있었다. 너는 내 말이라면 항상 끝까지 들어주고 믿어줬으니까.
다행히도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고 우리 사이는 전보다 더 돈독해졌다. 너와 난생 처음 커플링도 맞췄고 크리스마스에 데이트도 했다. 너와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을 마셨고 새해를 함께 맞았다. 너와 했던 많은 경험들은 내게 처음이었다. 약 3주간의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고 그 하루하루는 내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나날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꿈처럼 달콤한 시간이었다.
출국하기 하루 전날 너는 나를 마주한 채 숨죽여 울었다. 우는 너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아려서, 나는 네 두 손을 꼭 붙잡고 괜찮을 거라고 되뇌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울면 너도 무너질까 봐, 나는 우는 너를 바라보며 애써 울음을 삼켰다. 5달만 더 참으면 돼, 우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고 그날 밤 우리는 우는 대신에 웃으면서 헤어졌다. 교대 앞 사거리에서 택시 차창 너머로 멀어지는 너. 그게 내가 본 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너와 연락이 안 되는 시간이 늘어났고 나는 점점 더 외로워져 갔다. 그러나 나의 외로움은 너에 대한 집착이 되어 너를 더 힘들게만 할 뿐이었다. 그 때의 내게 남은 거라곤 너 하나 뿐이었으니까. 괘씸한 것 보다 불안함이 더 컸다. 초조해진 나는 너에게 자꾸만 보채기 시작했다. 더 좋아해 줘, 날 더 아껴 줘. 네가 날 사랑하는 걸 내가 더 잘 느낄 수 있게 지금보다 더 노력해 줘. 너도 분명 나처럼 힘들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칭얼거림일 뿐이었다.
내가 너에게 울면서 전화하는 날이 늘어갔고, 그 전화를 받을 때 마다 네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져만 갔다. 나는 무서웠다. 널 잃게 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네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 집착이 커질수록 너는 더 내게서 멀어져갔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네가 먼저 연락을 끊었고, 나는 너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가끔 네가 술에 취해 연락할 때도 나는 최소한의 반응만 하고 네 연락을 무시했다. 그게 서로를 위해, 더 정확히는 나를 위해 더 나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내 기억속의 널 지우지도 추억으로 남기지도 못하고, 너와 나눈 약속들을 맺지도 끊지도 못한 채 엉켜버린 시간 속을 헤매이고만 있었다. 새내기가 되어 너를 많이 닮은 동기를 만났을 땐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네 생각이 나서 혼자 한숨짓곤 했다. 네게 연락이라도 한번 해 볼까, 하고 수십번은 더 망설였지만 너는 날 완전히 잊었을 것만 같았고 나는 너에게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으로 남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내 관두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와중에도 너는 여전히 내 맘속 깊은 곳에 박힌 가시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사랑했던 너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가 애닳도록 그렸던 너에게서 연락이 왔다. 두근대는 마음에 네가 보냈다는 것만 확인하고 한참을 가슴이 떨려 메세지를 읽을 수가 없었다. 답장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문자를 보내면 혹시라도 네가 답장을 하지 않을까 봐 급히 전화를 걸었다.
십수 개월만에 들은 너의 목소리는 내게 익숙했던 밝고 활기찬 목소리보다 많이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궁금한 것도, 하고싶은 말도 많았지만 감정이 앞선 탓에 말을 좀처럼 이을 수가 없었고 간간이 오가는 짧은 문장들 사이에는 긴 침묵만 이어졌다.
사실은 나도 많이 미안하다고, 먼저 연락하고 사과해줘서 고맙다고, 예쁘고 따뜻한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그만 심술보가 터져서 냉기가 잔뜩 서린 미운 말 밖에 해주지 못했다. 나랑 꼭 닮은 너는 어쩜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나와 비슷한지. 너와 내가 서로 때문에 아파한 이유는 네 잘못만이 아닌데 굳이 지금 와서까지 내게 사과하고, 내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하는 네 모습에 나는 대체 무엇이 너와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었나 싶어 조금 허탈한 한편 무서웠다. 네가 이랬던 적은 처음이 아니고 나는 네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끝냈는지 알고 있으니까. 내가 이제와서 너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더라도 아마도 전과 비슷한 이유로 상처받게 될 테니까. 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판단이 서질 않아서 오늘은 너에게 내 솔직한 마음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저 술기운에 감정이 앞서서 연락했겠거니 하고 넘기려 했는데, 보고 싶었다는 너의 단 한 마디에 마음이 요동치는 걸 보니 역시 너를 아직까지 못 잊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 착잡하다.
너와 나는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긋난 걸까, 그리고 대체 왜 지금까지도 이렇게나 아픈 걸까. 마음속에 남아있는 감정들을 모두 쏟아내고 아무것도 남김없이 비울 수 있다면 좀 나을 것 같은데, 나는 아직 그게 어려워서 또 너에게 닿지 못할 편지를 쓴다.
#24138번째포효
오늘 새벽, 사랑했던 너에게서 문자가 왔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난 더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서 그대로 산산조각나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꼬박 일 년 만에 핸드폰 액정에 비친 네 이름 세 글자는 아직도 내 심장을 터질듯이 빨리 뛰게 했다.
너와 나는 수 년간 서로의 제일 친한 친구였고 그 중에서도 일년 가까이를 연인으로 지냈다. 주위 사람이 마음고생 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지 못하는 성격 탓에 별 생각없이 건넸던 내 작은 손길에도 자기는 내가 아니었으면 혼자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낼 수 없었을 거라며 고마워하던 마음이 예뻤고, 언젠가 기댈 곳이 없어 힘들어했던 나를 감싸 안아주던 듬직함이 참 고마웠다. 오지랖 넓은 것도, 사람 좋아하고 외로움 타는 성격도, 좋아하는 음료부터 취미까지 우리는 서로 너무 닮아 있었고 그런 너에게 더 친밀감을 느꼈다. 유학생이었던 나 때문에 너는 잠도 못 자고 새벽에 내게 전화를 걸었고, 여름이 되어 아주 잠깐 동안만 한국에 들어왔을 때에도 입시학원을 다니느라 시간이 없었던 나를 위해 네 스케쥴도 과감히 포기한 채 내가 있는 곳으로 어디든 언제든 달려오곤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에게 왠지 모를 호감을 내비치는 너를.
아니겠지, 아닐거야. 정이 많은 네가 친한 친구인 나를 그만큼 편하게 대하는 것 뿐인데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네가 부담스러워 너를 밀어내려 할수록 너는 내가 열심히 쌓아둔 방파제를 아득히 넘는 파도가 되어 내 마음에 밀려왔다. 우리가 처음 친구가 되었을 땐 내가 너의 버팀목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네가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우리는 고3이 되었고, 밤공기가 시원했던 여름방학의 어느날 밤 어두운 운동장 스탠드에서 너는 내게 고백했다. 나는 아직도 그 밤의 네 떨리는 눈빛을, 촉촉한 음성을, 너와 처음 나눴던 수줍은 키스를 잊지 못한다. 내가 너를 만난 지 4년이 좀 넘었을 즈음, 우리는 그렇게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다.
나는 너를 내 마음 다 바쳐 사랑했다. 장거리 연애를 힘들어하는 너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 전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아시아 대학 여러 곳에 원서를 넣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여태까지 서로에게 든든한 서포터가 되어왔고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해 왔으니까, 남은 유학생활 1년 정도는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잠시, 여름이 끝나고 우리 사이는 급격히 틀어지기 시작했다. 일만 킬로미터가 넘는 둘 사이의 거리, 12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시차, 두 고3의 너무도 다른 하루 일과와 수험 스트레스. 친구였던 시절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들이 어느 새 큰 벽이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았지만, 수능이 끝나면 나아질 거라 믿었다. 나는 겨울방학에 다시 한국에 가서 너를 볼 생각 하나로 매일을 버텼다.
내가 그 해 겨울에 한국에 돌아갔을 때 너는 이미 어딘가 변해 있었다. 쌀쌀해진 공기처럼 네 마음도 차갑게 식어버린 것만 같았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말처럼, 너는 내 출국을 2주 정도 남겨둔 어느 날 새벽에 내게 네 진심을 털어놓았다. 내가 보고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도 힘들고, 내가 힘들어할 때 그런 나에게 자기가 당장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게 제일 힘들다며, 사실은 내게 헤어지자 말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너무도 이기적인 네 말에 화가 났지만 너를 절대 잃을 수 없다는 생각이 더 컸기에 어떻게든 널 설득하려 했다. 자신있었다. 너는 내 말이라면 항상 끝까지 들어주고 믿어줬으니까.
다행히도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고 우리 사이는 전보다 더 돈독해졌다. 너와 난생 처음 커플링도 맞췄고 크리스마스에 데이트도 했다. 너와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을 마셨고 새해를 함께 맞았다. 너와 했던 많은 경험들은 내게 처음이었다. 약 3주간의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고 그 하루하루는 내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나날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꿈처럼 달콤한 시간이었다.
출국하기 하루 전날 너는 나를 마주한 채 숨죽여 울었다. 우는 너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아려서, 나는 네 두 손을 꼭 붙잡고 괜찮을 거라고 되뇌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울면 너도 무너질까 봐, 나는 우는 너를 바라보며 애써 울음을 삼켰다. 5달만 더 참으면 돼, 우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고 그날 밤 우리는 우는 대신에 웃으면서 헤어졌다. 교대 앞 사거리에서 택시 차창 너머로 멀어지는 너. 그게 내가 본 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너와 연락이 안 되는 시간이 늘어났고 나는 점점 더 외로워져 갔다. 그러나 나의 외로움은 너에 대한 집착이 되어 너를 더 힘들게만 할 뿐이었다. 그 때의 내게 남은 거라곤 너 하나 뿐이었으니까. 괘씸한 것 보다 불안함이 더 컸다. 초조해진 나는 너에게 자꾸만 보채기 시작했다. 더 좋아해 줘, 날 더 아껴 줘. 네가 날 사랑하는 걸 내가 더 잘 느낄 수 있게 지금보다 더 노력해 줘. 너도 분명 나처럼 힘들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칭얼거림일 뿐이었다.
내가 너에게 울면서 전화하는 날이 늘어갔고, 그 전화를 받을 때 마다 네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져만 갔다. 나는 무서웠다. 널 잃게 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네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 집착이 커질수록 너는 더 내게서 멀어져갔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네가 먼저 연락을 끊었고, 나는 너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가끔 네가 술에 취해 연락할 때도 나는 최소한의 반응만 하고 네 연락을 무시했다. 그게 서로를 위해, 더 정확히는 나를 위해 더 나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내 기억속의 널 지우지도 추억으로 남기지도 못하고, 너와 나눈 약속들을 맺지도 끊지도 못한 채 엉켜버린 시간 속을 헤매이고만 있었다. 새내기가 되어 너를 많이 닮은 동기를 만났을 땐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네 생각이 나서 혼자 한숨짓곤 했다. 네게 연락이라도 한번 해 볼까, 하고 수십번은 더 망설였지만 너는 날 완전히 잊었을 것만 같았고 나는 너에게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으로 남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내 관두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와중에도 너는 여전히 내 맘속 깊은 곳에 박힌 가시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사랑했던 너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가 애닳도록 그렸던 너에게서 연락이 왔다. 두근대는 마음에 네가 보냈다는 것만 확인하고 한참을 가슴이 떨려 메세지를 읽을 수가 없었다. 답장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문자를 보내면 혹시라도 네가 답장을 하지 않을까 봐 급히 전화를 걸었다.
십수 개월만에 들은 너의 목소리는 내게 익숙했던 밝고 활기찬 목소리보다 많이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궁금한 것도, 하고싶은 말도 많았지만 감정이 앞선 탓에 말을 좀처럼 이을 수가 없었고 간간이 오가는 짧은 문장들 사이에는 긴 침묵만 이어졌다.
사실은 나도 많이 미안하다고, 먼저 연락하고 사과해줘서 고맙다고, 예쁘고 따뜻한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그만 심술보가 터져서 냉기가 잔뜩 서린 미운 말 밖에 해주지 못했다. 나랑 꼭 닮은 너는 어쩜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나와 비슷한지. 너와 내가 서로 때문에 아파한 이유는 네 잘못만이 아닌데 굳이 지금 와서까지 내게 사과하고, 내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하는 네 모습에 나는 대체 무엇이 너와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었나 싶어 조금 허탈한 한편 무서웠다. 네가 이랬던 적은 처음이 아니고 나는 네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끝냈는지 알고 있으니까. 내가 이제와서 너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더라도 아마도 전과 비슷한 이유로 상처받게 될 테니까. 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판단이 서질 않아서 오늘은 너에게 내 솔직한 마음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저 술기운에 감정이 앞서서 연락했겠거니 하고 넘기려 했는데, 보고 싶었다는 너의 단 한 마디에 마음이 요동치는 걸 보니 역시 너를 아직까지 못 잊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 착잡하다.
너와 나는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긋난 걸까, 그리고 대체 왜 지금까지도 이렇게나 아픈 걸까. 마음속에 남아있는 감정들을 모두 쏟아내고 아무것도 남김없이 비울 수 있다면 좀 나을 것 같은데, 나는 아직 그게 어려워서 또 너에게 닿지 못할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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